30시간을 떠안다.

OJT 8

by RUKUNDO

조금 껄끄러운 인사를 마치고 다시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앞으로 파견지에서 어떻게 일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협의를 해야하는 시간이었다.

OJT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였지만

솔직히 나는 아직 뭐가 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협의라니, 도대체 무엇을 협의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방금 전 처음보는 상사를 밀어버리는 황당한 해프닝까지 겪지 않았는가.

머릿속은 뒤엉키고, 몸은 축 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을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와 펜이,

오늘따라 유난히 나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익숙한 얼굴이 문밖에서 걸어 들어왔다.

첫날부터 빨간 픽업트럭을 몰아주던 운전기사 아저씨였다.

그래도 몇번봤다고 괜히 반갑다.


그가 뚜벅뚜벅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저 아저씨가 왜 여기 걸어들어오는건지, 조금 의아했다.

하지만 파비앙에게 묻기엔 조금 뻘쭘했다.

아니, 말을 걸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눈알만 굴리며 상황을 살필 뿐이었다.


파비앙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어갔다.

아저씨의 이름은 존(John)이라고 했다.

사실은 운전기사가 아니라 ESSA의 컴퓨터 선생님이라고 했다.


파비앙이 존에게 작게 속삭이자 그는 곧바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아마도 방금의 해프닝을 간단히 설명한 것 같다.

고맙기도 하고 약간 민망하기도 했지만 악수만큼은 익숙했다.


파비앙이 들고 온 종이는 컴퓨터 수업 시간표였다.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컴퓨터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존이 혼자 수업을 맡아 수업을 받지 못하는 학급이 많았다고.

파비앙은 더 많은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내가 그 빈 자리를 메꿔주면 좋겠다고.


선배 단원들은 첫 학기에는 주당 수업이 16시간을 넘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수업 준비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그렇게 잡으라 했다.

그런데 파비앙의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가능한 많은 학생들이 컴퓨터를 배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자리를 잡고 나니,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파비앙은 타고난 협상가가 틀림없다.


‘첫 학기니까 적응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번 학기는 수업을 조금만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언어도 서툴러 어버버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손이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손짓발짓으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 여기, 여기….

제가 수업을 할게요

생각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고,

급한 성격이 몸을 앞세워 결국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첫 학기에 한 주에 무려 30시간의 수업을 떠안고 말았다.

저지르고 나니 마음은 후련했지만, 뒤늦게 걱정이 한가득 밀려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밝은 표정의 파비앙과 존을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다가 힘들면 다음 학기쯤 조금 조정하면 될테니까.
어찌저찌 흘러가며 여기까지 와버리지 않았던가.
이왕 시작한 것 되는대로, 할 때까지 해보자 싶었다.


그렇게 내 인생 최초의 업무 협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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