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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초중년생 May 17. 2021

눈의 여왕이 보여준 사회적 성장의 의미

주인공 '카이와 겔다'는 어디 가고,  '눈의 여왕'이 제목이 되었을까?

[동화 속에서 악역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엄지공주, 미운 아기오리,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라는 제목에서 보이듯 통상 동화책의 제목은 그 주인공 자체가 제목이 된다. 아무도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말레피센트'라고 부르지 않고, 빨간 모자를 '할머니 먹는 늑대'로 부르지 않고, 신데렐라를 '계모와 언니들'이라고 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눈의 여왕은 그렇지 않다. 소위 말하는 동화 속 악역이라 생각되는 인물이 제목이 되었다.


[눈의 여왕 속 줄거리]

눈의 여왕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사악한 거울 조각이 카이의 눈에 들어가게 되면서 소년은 사악한 것만 보는 눈을 갖게 된다. 눈보라가 날리는 날 소년은 눈의 여왕을 따라가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소년의 친구 겔다는 온갖 시련을 겪고, 극복하여 눈의 여왕의 성을 찾아가 결국 소년을 구하고 해피 앤딩을 맞는다.


[눈의 여왕은 과연 악역이 맞을까?]

순수한 어린 소녀와 소년에 대척점을 지는 눈의 여왕의 역할을 굳이 분리하자면 주인공보다는 악당이라 불리는 게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다시 읽은 동화 속에서 눈의 여왕이 악의 역할을 맡게 된 이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소년이 변하게 된 주체가 되는 거울 조각은 '사악한 트롤'이 만든 것이다. 심지어 세상을 혼란에 빠트린 거울이 깨지게 된 사건도 매우 우연적으로 일어난다.

(나쁜 모습만 비치는 거울에 기뻐하던 트롤은 천국으로 거울을 옮겨 천사들과 신도 멍청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거울을 점점 높이 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거울을 높이 운반하는 과정에서 거울의 흔들거림은 심해졌고, 결국 흔들거리는 거울을 놓쳐 깨져버리게 된 것이다.)


눈의 여왕이 트롤에게 거울을 만들게 은밀히 지시했는지, 아니면 트롤의 마음을 은연중에 조종했는지 어떤 세계관이 따로 숨겨져 있는지는 모를 노릇이지만 동화 속에서 눈의 여왕과 트롤의 관계는 특별히 연관된 것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눈의 여왕의 잘못은 그냥 길가에 버려진 것 같은 소년 하나 주워와서 심심하지 않게 낱말 조각 맞추기 놀이를 시킨 일뿐이다. (심지어 낱말을 다 맞추면 스케이트 선물까지 해준다고까지 했다!)


거울 조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나쁘게 보이던 카이에게 단 하나 완벽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눈송이'였다. 카이와 겔다의 할머니가 설명하는 눈의 여왕은 눈의 통치자로서 함박눈이 쏟아질 때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눈의 통치자로서 눈과 함께 나타난 여왕이 당시 눈송이만 완벽해 보이던 카이의 눈에서는 완벽한 존재 그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갑자기 나쁜 것으로 가득 차 보이게 된 세상을 뒤로하고, 아무 미련 없이  따라가게 되지 않았을까?



[어른이 돼서 다시 읽은 동화의 재해석]

10살, 20살, 30살 등 다른 나이의 읽은 소설은 매번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그동안 겪은 경험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 책의 줄거리가 변화된 의미를 화자에게 주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읽었던 눈의 여왕은 '나쁜 여왕을 물리치고, 두 주인공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읽은 눈의 여왕에서 다른 부분이 눈에 보였다. 바로 동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눈의 여왕을 따라 궁전에서 지내게 된 카이는 "이성의 거울"이라는 곳에서 퍼즐을 맞추며 일상을 보낸다. 여왕이 카이가 "영원 (Evighden)"이라는 단어를 완성하면 궁에서 풀어주고, 스케이트 한 켤레도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겔다의 도움으로 "영원"이라는 단어를 완성한 카이는 깨진 거울을 몸에서 빼내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에 도착한 카이와 겔다는 그들의 몸이 이미 많이 성장한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동화의 결말은 할머니가 읽어주는 성서로 끝을 맺는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너희는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


갖은 모험을 통해서 변화하는 전형적인 성장 동화 인지 알았다. 그러나, '순수한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굳이 온갖 모험으로 몸과 마음이 성장한 주인공들에게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성서 문구를 읽는 할머니로 끝을 맺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시 읽은 눈의 여왕에서 나는 '순수함으로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는 안데르센에 생각에서 새삼스럽게 그의 종교적 신념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순수한 동심에 대한 집착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할 것만 같은 어린아이의 동심의 세계의 대한 어른의 동경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를 읽는 화자가 대부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성장을 동반하는 어린아이인 것을 감안하면 성장을 촉발하기보다는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듯한 동화에서 작가의 새로운 면이 보였다.


[눈의 여왕의 내재된 "영원"의 의미]

이쯤에서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동화 속 주제가 동심에 대한 집착과 동경이라면, 주인공들과 대척점을 이루는 눈의 여왕은 그 동심을 막는 어른에 상징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눈의 여왕의 이미지는 차가움, 공허함, 냉혹함과 동시에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차갑고 이성적인 어른의 역할을 맡고 있는 눈의 여왕이 '영원'이라는 단어를 굳이 카이에게 맞추게 부탁한 이유가 뭘까? 영원이라는 단어의 뜻은 '어떤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거나, 시간을 초월하여 변하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동심에 대한 집작을 보여주는 작가에게 '영원'은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내포하고 있는것처런 느껴진다.


몸은 어린아이지만 거울 조각으로 어른의 삶을 보는 소년은 몸과 마음의 갈등이 심화되는 사춘기를 생각나게 한다. 사춘기의 소년에게 어린이의 마음을 찾기 위한 단어를 맞추는 일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냉혹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으려 뒹굴다 공허한 어른, 즉 눈의 여왕이 되어버린 작가 본인이 어른과 어린아이의 경계에 머물러 색채가 모호한 존재에게 삶의 숙제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눈의 여왕에 보여준 "성장"의 의미]

일반적으로 20세면 성인으로 간주된다. 20살 때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만 생물학적 성장이 멈추고, 법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음에도 계속 사회는 성장을 요구한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좋은 직장을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커리어를 위해 지속적인 자기 계발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과 가족의 부양을 위해 성장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는 개인에게 여러 종류의 성장을 요구한다.


안데르센은 본인이 그토록 동경하는 '순수한 사랑 혹은 마음'으로 '영원'을 완성하며 주인공들의 성장을 멈춰버린다. 그에게서 더 이상의 성장이라는 이름의 고난을 멈추고 싶은 어른의 발악이 느껴지기도 하다.


각자의 삶의 '영원'이 있겠지만 내 삶의 '영원'은 무엇일까?  앞으로는 또 모르겠지만 현재 내 삶에서 '영원'이 가지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영원한 관계도, 영원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에 안타깝기도 하지만, 영원한 실망도, 영원한 슬픔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안도하게 되기도 하다.


나는 '허상'으로 '영원'이라는 퍼즐을 완성하고, 불가피하게 성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전까지야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사회적 성장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당분간도 그런 성장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회적 성장의 허상을 깨닫고, 나에게 필요한 성장만 받아 듦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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