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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May 01. 2024

좋은 이별이 있을까?

< 삶의 다정한 목격자 >


언니와의 사별     


사실,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는 일은 예전부터 소망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도 도통 행동으로 옮기기가 힘들었다.

나는 한동안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간신히 에너지를 끌어올려 정말 해야 할 일을 해내고 나면,

몸도 마음도 무거워 그냥 누워만 있고 싶었다.

이런 시간들이 길어지니 문득 두려워졌다. 

그 무기력마저 습관이 될 것만 같았다.

사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가끔 씩 고개를 내밀고 있는 무기력의 가장 큰 이유를.

다만 모른 척했을 뿐이다.      


지난해, 나는 나의 셋째 언니와 사별했다.

언니는 위암이었다.

인터넷엔 위암이었지만 완치된 후 새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례들이 많았다.

하지만, 언니에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니의 생명이 조금씩 끝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느꼈던 무력감은

한동안 나를 지배했다.

그럼에도 ‘언니는 살 수 있을 거야, 회복될 거야.’ 하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듯,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언니 나이 55세에.   

  

사별했다고 해서 항상 슬픈 건 아니다.

나 또한 살아가야 할 일상이 있고, 해내야 할 책무가 있기에 그런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은 무심히 흘러간다.

하지만, 언니를 잃은 슬픔은 때때로, 갑자기 찾아온다.

모두가 잠든 밤, 자리에 누울라치면 갑자기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거나,

아무 생각 없이 카페에 들어갔는데, 언니가 좋아하던 빵을 본다거나.. 하면     


서툰 이별들     


세상에 좋은 이별이란 게 있을까?

그런 이별은 어떤 이별일까?

언니 나이가 55세가 아닌, 70세였다면 조금 덜 슬펐을까?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이겨내고 또는 슬픔을 억누르고, 

또는 그 슬픔의 무게에 잠식당한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경험은 그렇게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십여 년 전, 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나는 제대로 애도할 줄 몰랐던 것 같다.

아버지와 나는 보통의 부녀처럼,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전학 온 친구가 ‘넌 아빠가 없는 애인줄 알았어’라고 할 만큼

아버지는 집을 비운 날이 많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았고, 나는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급성폐렴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관계개선을 위한 시간 따위 줄 수 없다는 듯.

거봐. 인생이 네 맘대로 되진 않지?라고 비웃듯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뭐였지?’

나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계속 그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를 보내며 끝끝내 슬픔마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별을 대하는 자세  

   

그렇다면 진정한 애도란 무엇일까?

현대정신분석가들은 애도를 정신분석 치료의 핵심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생을 그르치는 문제와 만날 때 핵심에는 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오래된, 그러나 애도하지 못한 이별의 경험이 내면에 들어있는 사람은 새롭게 

만나는 이별 앞에서 더 깊이 절망하고 더 오래 슬퍼한다. 당면한 이별이 묵은 상실의 

감정들을 솟구쳐 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관습 속에서 살아가는가도 애도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  

 

 김형경의 애도 에세이 '좋은 이별'에서 김형경은 애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슬플 땐 울어. 참지 말고’

누군가에겐 이런 위로를 잘도 해왔으면서, 정작 나는 참기만 했다.

제대로 슬퍼하지 못했다.

신경 쓸 게 너무 많아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는 궁색한 핑계를 대며....

하지만 잘 참는 것이 미덕이 될 수만은 없다.

특히, 관계에 있어 그것은 소통을 방해하는 중요 요소가 된다.     


아직도 카톡 창엔 언니 번호가 떠 있다.

형부는 형부만의 방식으로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사진 속 언니는 봄날의 꽃처럼 환하게 웃고 있다.

가족 중에도 아픈 손가락이 있는 것 같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유독 힘든 일들이 많고, 인생의 굴곡이 많았지만 ‘다 좋아’라며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던 언니였다.

참 깔끔하고 단정했던 사람.   

  

언니의 죽음을 통해 또 한 번 느꼈듯

나는 좀 더 내 주변을 사랑하고 소중히 하려고 한다.

가끔 한 번씩 올라오는 이 무기력마저도 언니와의 이별에 필요한 

애도의 시간이 아닐까.     

가족 분위기를 생각하느라 눈물을 삼켰던 것.

눈물이 날까, 언니 사진을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나는 씩씩한 사람이다’라는 프레임에 나를 가둔 채 씩씩한 척했던 것.

언니가 너무 보고 싶다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사랑하는 언니가 떠났음에도 제대로 슬퍼하지 못한 모든 시간에 용서를 구한다.


세상에 좋은 이별은 없겠지만, 이별을 대하는 좋은 자세는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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