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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Sep 02. 2022

가치의 공백기

이번에는 터닝포인트 시기를 제대로 정의하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이번 기회를 통해 터닝포인트를 지혜롭게 보내기 위해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가치의 공백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겪고 있는 시기를 두 단어로 표현하자면 ‘가치의 공백기’다. 가치의 공백기란 말 그대로 나의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기존의 낡은 가치관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진리로 받아 들여온 의무들을 버린 시기다. 또는 나의 전부라 믿은 가치관이 나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채버린 시기다. 이 시기에 대해 명확히 표현한 독일의 철학자가 있다. 그의 표현을 빌려 우리의 모습을 정의해보자.


먼저, 우리가 추락하기 직전의 모습을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낙타’로 표현한다. 


“내부에 외경을 간직하고 있는,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이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짐, 가장 무거운 짐을 갈망한다. 무엇이 무겁고 곤란한가?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아주 무거운 짐이 실려지기를 원한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무조건 받아들인다. 우리가 낙타였다면 우리가 지어온 무거운 짐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원하는 모범적인 학생의 모습, 사회가 조장한 성공한 인생, 부모님이 원하는 자녀의 모습이다. 더 많은 공부와 학습지, 넘치는 학원과 과외, 더 무거운 스펙과 자격증, 더 바쁜 대외 활동과 학회 활동을 달라고 우리는 외쳤다. 그리고 어른들이 말하는 의무와 책임을 무겁게 지고 다녔다. 그동안 믿어온 가치들을 신격화하고 진리로 받아들여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들에게 그 가치를 전파하고 다녔다. 


낙타들은 처음에 어떤 과정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공부에 대한 믿음이 절실하다. 남이 주입한 의무를 세상의 유일한 의무로 받아들인다. 칭찬은 낙타도 춤추게 한다던가? 낙타는 무거운 짐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마다 더 순종적인 낙타가 된다. 이미 외부의 신호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잘하고 있다고 칭찬받으면 정말 잘 하는 줄 안다.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면 잘못하고 있는 줄 안다. 


사회는 낙타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에게 칭찬의 신호를 보냄으로써 더 많은 일을 떠넘긴다. 이들이 세속적 성공의 징표를 낙타에게 가져다주면, 낙타는 지금까지의 노력을 보상받는 느낌이 든다. 낙타는 항상 더 달라고 외친다. 짐을 다 옮겨주었을 때 받을 보상을 떠올리며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갈망한다. 


낙타는 고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낙타는 고민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가져다주길 바란다. 자발성은 없다. 낙타에게 자발성의 개념은 내가 누구의 짐을 선택하느냐, 얼마나 빨리 발을 굴릴 수 있느냐의 경쟁에서 쓰인다. 낙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묻지 않는다. 낙타는 내가 왜 사는지 묻지 않는다. 나의 가치관은 없지만 그것을 고민하기보다 남의 가치관을 믿고 따르는 게 오히려 편하다고 느낀다. 


사자의 정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핵심인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 밥을 먹고 있다가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거나 충격적인 말을 듣고 찾아올 수도 있다. 그야말로 갑자기 의문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삶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새로운 상태에 돌입한다. 이를 니체는 ‘사자’로 표현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정신의 사자가 왜 필요한가? 체념과 경외로 가득 찬 채 무거운 짐을 진 낙타로는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새로운 가치의 창조, 그것은 사자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창조,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이 정신은 일찍이 ”그대는 해야 한다“를 자신을 가장 신성한 것으로 사랑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정신은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자유를 강탈하기 위해 가장 신성한 것 속에서까지도 환상과 교만한 마음을 찾아야 한다.”


의문이 찾아오기 전까지 낙타는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해왔다. 즉 “그대는 해야 한다”를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그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나는 지금까지 왜 남의 짐을 들어주었는가 하며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해야만 하는 삶’에 무조건 동의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것을 따라줄 수 없다. 


우리나라 대학생은 대부분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의 정신이라고 일컫는 시기를 마주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누구보다 열심히 해온 공부가 이제는 도저히 왜 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런 생각과 함께 ‘지금까지 나는 왜 공부했는가’에 대하여 나만의 근거가 없음을 깨닫는다. 정말 내가 자발적으로 해온 공부가 맞는지 의심이 든다. 이들은 기존의 짐을 벗어 던지고 사자가 된다. 사자의 정신은 기존의 가치를 벗어난 상태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다. 


사자는 묻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한다. 아직 자신의 가치를 창조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아직 자신의 주관이나 성향,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없다. 물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사자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지만 창조를 위한 자유는 창조할 수 있다. 시간적 여유와 정신적 여유를 창조할 수 있다. 언제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낙타와는 다르게 언제든 ‘내가 왜 이 짐을 들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이러한 의문은 모조리 고통스럽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았을 때 그저 괴롭기만 한 의문이었다. 


사자의 상태가 바로 ‘가치의 공백기’다.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잠시 내려놓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다. 


다시, 가치의 공백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는 나의 가치관이라 믿었던 가치관에 공백이 생긴 상태다. 나의 포근한 터전이라고 믿은 성(castle)이 사실 나와 전혀 맞지 않는 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도망치듯 그 성을 빠져나온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까지 그 성안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도망치듯 나온 성 밖은 허허벌판이다. 누군가 ‘왜 공부하냐’고 물을 때 누구보다 대답에 자신이 있었다. 왜 성공하고 싶냐고 물을 때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성벽을 지킬 자신이 있었다. 나와 뜻을 함께하지 않는 친구는 내 성에서 함께 지낼 수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 성을 침략하려는 적들에게 항상 대항하기 위해 성벽을 더 높게 쌓아왔고 나중에는 성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성벽이 높아진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


하지만 성을 제 발로 나오자 어떻게 되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난처한 상황이다. 왜 그럴까? 우리는 성벽 안의 세상이 전부라고 믿고 무작정 성벽만 쌓아왔기 때문이다. 가치의 공백기는 위험하다. 쾌락과 권력의 맛에 쉽게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사자의 시기는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쉽게 주변에 휩쓸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주변 친구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고 싫으면 싫다. 또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이 곁에 없으면 외롭고 고독하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만큼은 안심이 된다. 


그동안은 어떻게 나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는지가 놀라울 뿐이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왜 일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낙타의 정신으로 살 때는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은 질문이다. 가치관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겠지만 어떤 가치관도 없는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낙타의 정신으로 살 때는 “그대는 해야 한다”라는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살아왔다. 그만큼 쉬웠다. 남의 말을 듣고 따르는 일은 정말 쉽고 간단하다. 물론 그 과정은 굉장히 땀나고 지치지만 보상과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불안한 것은 나에게 더 짐을 주지 않을까 봐, 보상을 제대로 주지 않을까 봐 걱정되는 것 그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해온 일과 공부, 인생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한다.


가끔 사자는 자신을 구원해주는 가치관이나 일을 만나기도 한다. 잠깐이지만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회의감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 가치관이나 일 역시 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사자의 정신이 된다. 다시 끝없는 추락이 시작된다.




어린아이의 정신 


니체는 마지막 단계를 어린아이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천진무구 그 자체이며 망각이다.” 사자는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라고 질문했다. 재미있게도 그 질문에 아이의 정신을 위한 정답이 있다. 아이들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즐길 뿐이다. 어른들은 모래성을 쌓는 아이를 보며 금방 무너질 성을 왜 쌓는가하고 의문을 품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는 현재의 순간만을 즐긴다. 과거나 미래는 없다. 모든 것이 현재다. 매일 새로운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다. 모르는 것은 눈치 보지 않고 질문한다. 그야말로 천진무구함 그 자체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들지 않지만,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데는 사십 년이 걸렸다.” 어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이다. 미래나 과거를 계산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에 사는 존재가 바로 어린아이들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롭고 놀랍다. 이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표현한 대목이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온다.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별거 아니게 느껴지는 일도 그의 앞에서는 무서운 수수께끼로 떠오른다.” (…) 그는 남자와 꽃을 피운 나무, 시원한 물 한 잔을 앞에 두고도 놀라서 커다랗게 눈을 뜨고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것을 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본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생소한 눈길로 바라본다. 끊임없이 놀라워하고, 의문을 품는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다 경이로워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감탄으로 입을 벌린 채 나무와 바다, 돌, 새를 바라본다. 그는 생각하지 이 무슨 신비란 말인가?”


말은 쉽지만 나는 이 단계를 그야말로 삶의 지혜가 응축된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저 즐길 수 있는 지혜는 단순히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이성적 의지 하나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이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나 지식을 망각하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지혜는 실로 놀라운 지혜다. 즉, 어린아이처럼 살자고 다짐해도 바로 어린아이처럼 살 수 없다.


다만 결심은 해볼 수 있다. 어린아이처럼 살아보겠다고 결심할 수는 있다. 결심을 하고 나서 하늘을 바라보며 마치 하늘을 처음 본 사람처럼 기뻐할 수는 있다. 점점 경험이 쌓이고 지혜가 축적되어 언젠가 어린아이의 정신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20살이 되고 나서 2년간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씨름을 했다. 그러다 결국 입대를 했는데 놀랍게도 전역하기 전까지 이 질문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치 대답을 찾은 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역을 하자마자 바로 다시 불안감과 초조함이 시작됐다. 다시 사회로 나오자 망망대해에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게 다 막막하고 막연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았고 이제는 왜 살아야 하는지 대답을 얻은 줄만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질문을 잊었을 뿐이었다. 나는 질문을 잊고 매 상황마다 진심을 다해 각각의 상황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판단하기 위한 훈련을 해왔을 뿐이었다. 


또한 군대에서는 이 질문보다 더 앞선 고민거리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군 생활을 잘 보낼 수 있을까’ ‘ 어떻게 하면 내 과거를 더 잘 해석할 수 있을까’ ‘독서는 정말 생산적인 일이 맞는가’ 등등 수많은 질문이 있었다. 이런 질문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다. 이런 질문들이 ‘나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보내는 방식이야말로 인생을 보내는 방식이다.’


또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전역을 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불안과 함께 찾아왔던 그 질문은 한순간에 희망의 질문이 되었다. 왜냐하면 전역은 언젠가 찾아오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에서 던졌던 ‘무엇을 해야 할지’는 도저히 언제 답이 나올지도 모르고 무슨 답을 내려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했지만, 전역을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는 그저 달콤한 상상이었기 때문에 즐거울 따름이었다.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은 행복에 도움을 준다. 회의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질문을 잊고 사는 시기가 정말 그 질문을 초월해서 얻은 경지인지, 아니면 잠시 환경이나 상황의 변화로 찾아온 일시적 현상인지는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은 갑자기 찾아오는 추락에 더 많은 상실감을 겪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가치의 공백기’ 단계에 있다. 하지만 완전한 공백이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과거의 습관이 남아있다. 행동의 습관, 사고의 습관이 남아있다. 성을 제 발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성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성을 들어갈 수 있다. 불안한 우리에게 기존의 낡은 가치관은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우리는 기존의 가치관을 완전히 버렸다기보다 의문을 가지고 있는 상태다. 우리는 언제든 낡은 가치관을 다시 쥐어 잡을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나갈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존의 생각과 행동의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가 맞이한 가치의 공백기는 사실 완전한 공백의 시기가 아닌 위태로운 시기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롭게 가치의 공백기 시기를 보낼 방법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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