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겪어 본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우리가 겪어 본 자유는 온전한 의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 바로 나에게 찾아오는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위로 솟아오른다면 우리는 이를 피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하지만 이런 일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있다. 즉,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 누구도 개인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뺏을 수 없다. 아무리 상대가 날 화나게 만드는 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화를 내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우리는 상대방에게 분노의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 그것은 바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인간은 바로 이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우리는 사실 언제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이제 자유를 이해했다면 지금 상황에서 자유가 왜 중요한지 이해해보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는 상태로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당장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답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빅터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물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그렇다. 물론 우리는 우선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내야 한다. 시련을 가져다주는 이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여의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지금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
그 방법이란 무엇일까? 내가 지금껏 주장한 대로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 시련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냐고 묻는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정리하자면 나는 “이 상황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순간 불필요한 고통을 받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불필요한 고통이 사라진다.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다. 그중에는 내가 고통을 즐겼나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고통이 많았다.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시간이나 행동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이는 내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깨닫게 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 고통에서 도저히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놀랍게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불필요한 고통은 사라지고 나에게 필요한 고통만이 남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 나는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고통을 해결할 일시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법이었다.
둘째, 필요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이제는 정말 무엇을 할지 찾아가며 겪게 되는 필요한 고통만 남게 된다. 가끔은 외로울 수 있다. 가끔은 해보지 않은 일을 하면서 미숙함을 느끼고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고통 역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할 수 있다. 나라면 그 고통을 ‘성장을 위한 거름’이라고 반응하고 싶다. 만약 이렇게 반응한다면 앞으로 찾아올 고통에 미리 겁을 먹고 두려워하더라도 그 두려움과 함께 행동해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셋째, 실질적인 행위에 집중할 수 있다.
이제 정말로 이 상황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필요한 고통으로 인해 낭비한 시간과 감정은 얼마나 많은가. 도피처로 피신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날린 날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지금까지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을 찾기 위한 실질적인 행위보다 다른 행동들을 택했다. 미래를 위한 생산적인 생각을 해나가야 했지만 생각하는 시간이 무섭고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회피해버렸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더 좋은 대안을 찾아가야 했지만 스스로를 숨기기 바빴다. 인간관계나 식습관, 미디어 사용 중독 등 일상의 여러 요소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는 힐링하며 보낸 시간의 90% 이상을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근본적인 창조적 변화를 추구하는 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돌려놓아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끔찍한 경험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다는 사실로. 우리는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누군가는 한순간에 자신이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당연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근거가 아무리 충분하더라도 내면에서 여전히 저항의 목소리를 외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우리의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지만 본능은 자꾸만 소리칠 것이다. '당연하고 말고를 떠나 너의 꼴을 봐. 당연하면 뭐 어쩔거야? 참혹하지 않아? 이렇게 무능해도 되겠어? 남들을 봐. 남들과 너를 비교해 보라고! 그래서 뭐가 달라지기라도 했어? 뭘 해야 할지 알게 됐어? 그래서 어디에 취업해야 할지 알기라도 했냐고!’
이제 우리는 이 본능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 평생을 말이다. 평생 대화할 목소리를 적으로 만들면 얼마나 피곤한 인생을 살지 생각해보라. 또한 평생 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목소리를 적으로 삼으면 얼마나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결정을 하게 될지 생각해보라.
그러니 본능을 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친구로 받아들여 보자. ‘그래 너의 생각 잘 알겠어.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상황은 그저 당연해. 우리는 이 상황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근거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하며 지혜롭게 대처하라. 본능의 목소리가 나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 관조하라.
본능이 이야기한다. ‘다시 미래를 떠올리려고 하면 너무 고통스럽지 않아? 내 초라한 모습을 생각해보려고 하니까 너무 두렵지 않아? 이제 그만 생각하고 유튜브나 보자’ 이에 이성은 대답한다. ‘잠시만 근데 나는 생각을 하면서 받을 고통보다 고통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생각도 하지 않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해. 이대로라면 무엇을 해야 할지 영영 찾지 못한다고. 만약 이 상황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일들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수많은 시간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본능도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줄지 모른다. 그리고 더 현명한 행동을 하나씩 일궈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내면에 두 가지 목소리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우리는 그 두 가지 목소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훈련을 해나가야 한다. 두 가지 목소리가 찾아올 때 둘 모두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둘의 주장과 근거를 천천히 들어보자.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평생 해야 할 본능과 이성과의 대화를 위한 훌륭한 훈련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을 넘어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책임감 있고 성실한 사람이다. 누구나 다 이 질문과 씨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대단한 용기와 체력, 인생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인생에 대한 허무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일수록 사실 그 누구보다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의미가 없다고 느끼면서도 끝까지 인생을 놓지 않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잠시 지쳐서 질문을 내려놓을 때도 있지만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당당하게 질문과 씨름한다. 이에 대해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삶에 과연 의미가 있느냐하는 의문과 씨름하는 것 그 자체는 병적인 현상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 삶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 의미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무엇보다도 실존적 좌절을 겪는다는 것은 그가 지적으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삶을 당연하지 않다고 믿기 시작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즉,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초심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당연하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사는가. 이 질문은 진지하고 성실한 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게으른 자는 질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내 수동적인 선택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찾아온 질문이다. 이 책임감이야말로 바로 자신만의 재능이다. 자신이 이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이 질문은 우리의 재능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기회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사치스러운 생각이나 잠시 찾아오는 변덕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잡생각을 몰아낼 수 있게 일이나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한다. 그러다 마치 ‘이반 일리치’처럼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지금까지의 인생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죽을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 있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삶과 죽음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 단 하나의 해답을 마치 절대 있을 수 없는 것인 양 머릿속에서 몰아냈다.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종종 그랬듯, 이 모든 것이 그가 제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둘러 자신이 늘 올바르게 살았음을 떠올리며 이 이상한 생각을 떨어냈다. (...)
‘내 삶 전체가, 의식적인 내 삶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지?’ 예전 같으면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을 절대 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는 그게 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에 맞서 싸우고 싶다는 충동을 마음속에 어렴풋이 떠오를라치면 서둘라 떨어내버렸던 그 충동, 그것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가 죽을 병에 걸려서야 얻게 된 깨달음을 우리는 지금 얻을 기회가 생겼다. 만약 이 상황을 정말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라는 질문과 용감하게 맞서 싸울 수 있다. 이제 정말 나의 가치관과 내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