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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Aug 31. 2022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나는 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모습을 더 명확하게 바라보았다. 과거를 곱씹어 볼수록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꺼림칙한 부분은 남아있다. ‘당연하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하는 점이다. 우리의 모습이 당연하다는 말을 들어도 여전히 지금 간절한 것은 '내가 인생을 바쳐서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어떤 사상’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찾는 그 간절한 '무엇'은 알다시피 곧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 터닝 포인트라 불리는 시기에 오랜 시간 머물러서 찾아야 한다. 그래서 터닝포인트 시기를 현명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현재의 모습에 대한 이해와 이유만 알아보았지, 그 이상으로 지금 내가 이 시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에 대한 생산적인 이해는 얻지 못했다.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터닝포인트 시기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당연하다는 이야기를 이제 막 접했다. 이성적으로는 이 사실을 이해했을지 몰라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당연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가슴 한 켠에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한 모습을 한심스럽게 받아들여 죄책감이 들 수 있다. 그리고 당장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때문에 옳지 못한 방식으로 터닝포인트 시기를 보낼 우려가 있다. 


또한 ‘당연하면 뭐가 달라지나!’라는 생각은 사실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에는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보고ㅡ 빅터 프랭클의 지혜를 빌려 당연한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 뒤로 터닝포인트를 지혜롭게 보내고 '무엇'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파악해보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여전히 의심이 들 수 있다.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당연한 것일까? 당연하다는 사실을 접했지만 내면에서부터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여전히 내 삶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사실을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따라서 정말로 이 상황이 당연한지에 대해 기존에 이야기한 내용을 정리하고 더 새로운 사실을 알아보자. 그러고 나서 당연하다는 사실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이야기해보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왜 당연한가?


먼저, 지금까지 해온 게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 말을 다르게 말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봐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지금까지 남들이 하라는 것만 해왔기 때문에 굳이 나에게 의미를 주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취업을 하기 전까지 한 공부들이 직장에서 쓸 일이 없다면 나에게 쓸모있는 능력 같은 건 없다. 그러니 가진 것도 없으며 판단력도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은 당연하다.


두 번째, 교육과 개인주의 이념이다. 개인주의에서 직업을 선택할 때 핵심은 ‘스스로 네가 할 일을 찾아라’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어떤 일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모순적으로 입시 공부는 암묵적으로 ‘반드시 해야 할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을 수 있는 판단력 근육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게 교육받는 시기를 거치고 나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진다. 부모세대에 비해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선택의 자유를 포기할 필요도 없어졌으며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일 하는 것을 넘어서서 더 고차원적인 욕구를 추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너무 많아진 선택지가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고 ‘더 고차원적인 욕구’를 당장 추구하고 싶지만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게 된다. 


세 번째 대답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본질에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커리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돈을 벌고 싶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고민일 때도 있다. 또는 당장 취업을 해야 하는데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는 고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민의 성격과 동시에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을 찾고자 하는 고민일 수 있다. 성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이 질문에는 분명히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숨어 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곱씹어 보면 ‘나는 무엇을 할 때 삶의 의미를 느끼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무엇을 할 때 삶의 의미를 느끼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면 지금 내 삶이 의미가 없다고 느끼게 될 가능성이 크고, 그러한 생각이 곧 ‘내 삶은 의미가 있는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하게 만든다. 그래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쉽게 삶의 허무함과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내 삶은 의미가 있는가?’라고 물을까?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이 일이 ‘의미’가 있는지 묻는다.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 행동을 한다. 반대로 의미가 없다고 믿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도저히 삶에 어떠한 의미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지독한 허무함에 빠져서 삶을 포기하게 된다. 인간은 유일하게 인생의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따라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생겨나는 당연한 질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질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동물은 가지고 있는 자원이 없으면 하나같이 자원을 찾기 위한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인간은 각자가 가진 사고방식에 따라 다른 행동을 보인다. 자원이 없는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 죄책감으로 방구석에 갇혀 있거나 혹은 더 열심히 일해서 자원을 찾으려 한다. 문제를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은 혁명을 준비한다. 신이 준 형벌이라고 믿는 인간은 더 간절히 기도하거나 제사를 지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우리는 각자 다르게 반응하고 행동한다. 만약 이 상황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에 파묻혀서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에만 몰두한다. 또 과도하게 자신의 탓을 하다 보면 정작 필요한 행동은 하지 않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생각과 행위만 하면서 문제를 겪는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단순히 사회와 교육의 탓으로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변화를 추구하기 위한 혁명 외에 해볼 수 있는 일이 없다. ‘무엇’을 찾기 위해 시작했지만 그 ‘무엇’이 혁명으로 확정되어 버린다. 또는 남의 탓을 하며 불평불만을 내뱉지만 막상 근본적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남의 탓으로만 돌리면 도저히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이 이해를 토대로 초반에 말했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두 부류로 돌아가 보자. 먼저, 방구석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면 도저히 일을 손에 잡지 못하는 행동 메커니즘을 가진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을 꾸역꾸역하는 부류도 있었다. 이들은 지금 하는 일이 일단 도움이 된다고 하면 꾸역꾸역해낼 줄 안다. 언젠가 보상이 온다는 기대가 있다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더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있다. 


분명 같은 상황인데 행동의 메커니즘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행동과 다른 인생을 보인다. 하지만 이전에 언급했듯이 두 부류는 공통점이 있다. 비슷한 고통을 겪고 비슷한 도피처를 선택한다. 실질적으로 무엇을 찾기 위한 행위는 하지 못한다. 인생에 대한 자발성을 쉽게 회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부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의 메커니즘은 다르지만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두 부류 모두 크게 다르지 않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는 행동이 당연하듯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무엇을 찾기 위한 당연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지금 상황을 내가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도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남 탓은 단지 우리가 왜 이런 현실에 처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해온 성찰의 과정일 뿐이다. 지금 상황이 왜 당연한지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실질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남 탓을 하는 사고방식이나 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 그리고 터닝포인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고방식이 내 행동을 좌우하는 메커니즘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무조건 나의 책임이고 남 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남의 탓을 하면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우리 인생에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때마다 나의 탓만 해버리면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탓을 적절히 할 때 우리는 보다 좋은 상황 판단과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다만 남탓을 하는 사고방식이 행동을 좌우하는 사고방식의 중심이 되어버리면 실질적인 행동과 멀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고방식에 관하여 이해했다면, 이제 그 다음 이해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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