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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Aug 29. 2022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자신이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고 있다고 느낀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밑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고 믿는다. 남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데 나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뒤쳐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히 주제넘게 주장하건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추락은 반드시 필요한 단계다. 


어렵게 말하자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나다운 게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서 추락은 불가피하다. 조금 더 어렵게 말하자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추락으로부터 단서를 얻는다. 즉, 추락하는 동안 얻은 지혜와 생각의 재료를 바탕으로 내가 무엇을 놓치고 살아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과격한 표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추락에 의존한다. 그러니 만약 내가 추락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분명 질문에 대답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는 기분 좋은 신호라 생각해도 좋다. 


왜 사는가?


알베르 카뮈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봤자 카뮈는 남이다. 하지만 언젠가 한번쯤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온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던진 순간, 우리는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전의 삶은 어떠했는가? 그 전까지는 왜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생각해야 한다는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인생은 그야말로 당연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시절 어느 날 밤에 찾아와 지금까지 남아있지만 그런 와중에도 삶은 언제나 내게 주어진 당연한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왜 사는가?’라는 질문이 갑자기 노크도 없이 치고 들어온 순간 우리는 그때부터 인생과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정말 나는 왜 사는가?’ 거대한 회의감이 생겨난다. 당연했던 삶이 당연하지 않게 다가온다. 어제까지는 당연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지금은 당연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왜 저렇게까지 아등바등 사는가? 그 전에는 산다는 게 당연했지만 지금은 왜 그들이 저렇게까지 하면서 살아가는지 묻고 싶어진다. ‘당신의 삶의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당신은 왜 사나요?’ 이전까지 당연하게 받아 들여온 모든 것이 이제는 거대한 물음표로 다가온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비슷하다. 이 질문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남이 해보라고 시켜도 하지 못한다. 나 스스로 어떤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아도 질문하지 못한다. 이 질문은 의지와 별개로 갑자기 찾아온다. 잘 살고 있다고 믿어온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이 질문은 내 인생에 딴지를 건다. 


지구를 둘러싼 수많은 지혜들과 속담들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해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 진정한 뜻을 알 수 없는 게 많다. 아무리 남들이 자신의 지혜를 가르치려해도 내가 직접 경험을 통해 깨닫지 않으면 그 지혜의 진정한 참맛을 느끼지 못한다. 책과 영상에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인생이란 이런 것, 성공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도 자신이 직접 경험으로 깨닫기 전까지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이 질문의 무게와 의미를 느낄 수 있다. 한 번 질문을 던져본 이들은 이제 나에게 의미를 주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한다.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겪는 사람의 암담하고 외로운 경험을 직접 경험한다. 추락한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만 들어왔지 내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그게 무슨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직접 경험하며 추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추락의 의미


여기서 말하는 추락은 사업상의 실패나 취업, 대입 결과가 좋지 않아서 ‘추락하고 있다’고 느끼는 상황을 포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포괄적이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자면 평온했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인생에 대한 회의감 등을 포함한다. 그리고 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인생을 바쳐서 기꺼이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어떤 꿈과 인생의 목적’을 이제는 찾아야만 하는 그 시기를 포함한다.


추락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달려왔는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 관성대로 살아온 삶에 제동을 걸어준다. 내가 옳다고 믿은 삶이 옳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추락은 남들이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겠다고 다짐한다고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는 하라는 대로 해왔고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인생도 일도. 지금까지는 살아가는 대로 살았고 나 역시 그렇게 사는 것을 원했지만 이제는 왜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의도치 않게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추락은 우리의 단단함을 위해, 이제 진정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삶’을 위해 천금 같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추락을 통해 우리는 인생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시작했지만 추락이 전부는 아니다. 기회와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이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고민을 하지만 모두가 각자 이 경험을 다르게 해석한다. 누군가는 실패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성공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는 고마운 기회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재앙으로 생각한다. 해석은 우리의 판단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판단력이 부족한 대한민국 사회초년생의 경우 눈앞에 나타난 상황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아니, 나는 어른들 역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믿고 있다.내가 생각하기에, 추락의 경험은 우리에게 삶을 되돌아보고 개선점을 찾아 개선해 나가라는 신호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픔이 찾아올 때마다 반창고만 붙이면서 상처를 덮어두었다. 더 이상 반창고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상처는 깊어졌지만 우리는 해결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반창고만 붙여왔다. 추락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살아오고 그저 일시적인 처방만 받아왔다. 이제는 반창고를 떼어내고 상처를 마주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갔다. 지금까지는 내가 왜 아픈지도 모르고 왜 이런 행동들을 저지르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는 알았다. 우리는 도저히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아파했다는 사실을. 많이 아프므로 스스로를 더 파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픈 사실을 마주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온다. 하지만 기회는 늦을수록 잡기 어렵다.


이 추락이 기회라면, 사실 지금 찾아온 기회를 놓쳐도 문제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대답하지 않아도 문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선물 같은 기회는 한 번 찾아온 순간 죽을 때까지 원하지 않아도 계속 찾아오기 때문이다. 마치 공포 영화 속 인형들처럼 아무리 버리고 쫓아내도 다시 돌아온다. 쳐다보기 싫어서 버려도 어느새 내 방으로 돌아온다. 찾아온 선물을 받지 않고 버려둔 사람은 20대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나 30대가 되어서도 선물을 다시 받을 수 있고 심지어 40대가 넘어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동안 상처는 더 깊어질지도 모른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동안 쌓아 놓은 일들이 많기 때문에 다시 나의 진정한 삶의 의미, 꿈, 사명, 자아를 찾으러 떠나려면 사회초년생에 비해 포기해야 할 게 많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은 분명 많겠지만 어떤 창조적이고 커리어적인 목표를 가진다면 분명 자신이 지고 있는 책임감만큼 시작 하기 어렵다. 따라서 처음 기회를 던져 두었을 때에 비해 훨씬 그 기회를 잡기 어렵다. 예전에는 기회를 잡고자 하면 고통스러울 뿐 바로 잡아둘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갖추었다. 이미 쌓아둔 커리어적인 성공이나 마냥 나만 생각하기 어려운 책임감을 주는 가정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때 찾아오는 기회는 기회가 아니고 하나의 짐이 된다. 한때는 나의 사명을 찾고자 했던 바로 그 꿈을 다시 한번 ‘신 포도’로 만들어버린다. 


반대로 상황이 어느 정도 괜찮거나 용기가 있다면 3, 40대에게 찾아오는 기회가 오히려 잡기 쉬울지도 모른다. 20대 초반과는 다르게 30대는 그동안 더 많은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재료가 많다. 능력이나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역시 그 전까지는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면 이제는 경험이라는 근거가 생겼다. 따라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에 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게 비교적 수월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이미 찾았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꺼낼 수 있는가? 그것을 꺼내서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지점이 된다. 또한 아무리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더라도 20대보다 더 많이, 그리고 빠르게 내용을 채워 나갈 수 있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글쓰기를 쓴다면 이들은 사회초년생에 비해 많은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대해 생각했을 때 만약 20대 때부터 기회를 붙잡아서 눈과 뇌에 레이더를 켜고 살았다면 그 몇 년 동안 경험을 받아들이는 양과 질이 얼마나 달랐을까 생각해보자. 판단력에 대한 관점에서 보자면, 매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기회는 언제든 찾아오기 때문에 성급할 거 없지만 아무래도 기회를 미뤄두면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인다. 


다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나는 내가 추락하고 있다고 느낄 때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내 등에 날개가 보이지 않아서 였을까. 그렇다. 나에게 날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시적인 의미에서 날개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끝도 없이 추락하던 어느 날, 나는 내가 날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저 높은 하늘을 날아보려고 애를 쓰다가 마치 이카루스가 하늘에 높이 올랐다가 추락한 것처럼 추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날고 있었기에 추락했다. 날개가 없었다면 애초에 날아보지도 않고 땅에 머물러 있었을 터이다.


추락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날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추락하고 있는 사람 역시 당장은 자신이 날개가 있는 줄 모른다. 하지만 끝도 없이 추락하는 어느 날 나에게도 날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다시 힘차게 날갯짓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깊게 떨어진 만큼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터닝포인트는 존재하는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기 속 이들은 이제 날개를 다시 펼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라는 시기에 도달했다. 누군가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그 사람은 아직 터닝포인트가 오지 않은 것이라고. 이에 관련한 이야기가 있다. 



‘아침에 생기는 버섯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 장자


봄과 가을을 모르는 벌레는 지구에는 여름과 겨울이 전부라고 말한다. 사계절을 살아온 벌레는 그들에게 여름과 겨울 그 사이에 봄과 가을이라는 계절이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봄과 가을을 모르는 벌레는 말을 믿지 못한다.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터닝포인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고 밖에 나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터닝포인트를 내가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터닝포인트가 있다고 말해도 터닝포인트를 겪지 못한 사람들은 믿을 리가 없다. 물론 그 터닝포인트는 단 한 순간의 번뜩임은 아닐 수도 있다. 나도 그런 터닝포인트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을 전환하는 터닝포인트는 반드시 존재한다. 터닝포인트로 무엇이 변했는가? 물론, 그것도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인생은 변화한다. 


물론 봄과 가을을 반드시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그 벌레가 벚꽃의 설렘과 낙엽의 고요함을 모르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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