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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Aug 26. 2022

사회초년생이 저지르는 흔한 커리어 실수들

사회초년생 대다수는 소박한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곤 하는데, 이때 저지르는 흔한 오류들이 있다. 이들이 저지르는 커리어 선택과 진로에 대한 오류와 허점을 알아보자.


우리는 항상 선택에 쫓겨 살아왔다. 아직 뭘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항상 선택의 순간은 다가왔다. 미래에 대한 호기심 없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만을 좇아온 학생들은 어느 날 갑자기 미래를 선택해야 했다. 더 바빠지기 전에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만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미래에 대한 고민은 잠시동안의 잡념 정도로만 흘러간다.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다시 기존에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다행인 사실은 나름대로 성인이 되고 나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전공을 선택했을 때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추가된 소박한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당장은 뭘 할지 모르더라도 우리는 시작을 무겁게 생각한다. 시작을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 갖은 생각을 한다. 첫 직장을 성공적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 애를 쓴다. 어떤 일은 나랑 맞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며 쳐다도 보지 않고 또 어떤 일은 나랑 맞을 거 같다 느껴서 기를 써가면서 쟁취하려 한다. 


‘내가 잠깐 저 일이랑 비슷한 일을 해봤는데 난 그때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어. 그래서 저 일은 나랑 안 맞을 거 같아’ 




‘너 회 좋아해?’


나는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가끔 해산물 반찬이 나올 때면 같이 먹는 친구들에게 ‘너 해산물 먹어?’라고 묻곤 한다. 이러면 몇몇 친구들은 해산물을 싫어한다고 답한다. 나는 이런 대답을 들으면 ‘생각보다 주변에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정도로만 생각하며 물어본다. 

“왜 해산물이 싫은데?” 


대부분의 경우 비리다거나 냄새가 싫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래서 먹어 봤어?”라고 물으면 많은 경우 “비려서 못 먹겠어”라고 말한다. 한 입만 권유해보면 “아니 먹어보기도 싫어.”라고 대답한다. 냄새 때문에 무언가 먹기를 주저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 맛있는 해산물을 냄새 때문에 도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영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보다는 일부 대답이 놀랍다. 왜 해산물을 먹지 않냐고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은 

“먹어본 적 없어서. 근데 먹기 싫어.” 


물론 해산물에 관한 개인적 경험이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미래를 선택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초년생들은 종종 경험해보지도 않은 일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한다. 단순히 그 일이 어떻게 보이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만 보고 말이다. 


물론 간접 경험을 통해 얻은 의견은 중요하다.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 없으므로 미래를 고민하는 데 있어 간접 경험을 통해서 단서들을 얻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간접 경험을 통해 단서를 얻는 것과 간접 경험만으로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이들의 평가 기준은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경우가 많은데, 쉽게 말해 많이 벌면 좋고 적게 벌면 나쁘다는 생각이다. 인정받으면 좋고 무시 받으면 나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안정적이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 일을 하면 즐겁게 할 수 있을지는 그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로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막상 돈이나 안정을 보고 들어간 뒤 그들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지가 않아’라고 말하고, 돈을 쓰는 주말이 내 유일한 낙이라고 말한다. 일반화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어쩌면 그중에 의미를 성취하려는 본래의 의미를 잃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돈과 안정은 중요한 문제다. 커리어 선택에 있어 합리적인 태도이다. 다만 선택을 경제적 보상이나 안정, 사회적 지위라는 기준만으로 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 그 이상의 무언가에서 의미를 얻고 싶다는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더 해나가기에 앞서 한 가지 꼭 전제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무리 우리 스스로 ‘돈을 잘 주는 기업은 좋으니 여기에 취업하겠어’라고 생각해서 그 기업에 지원해봤자 기업이 우리를 선택하지 않으면 기회도 없다. 말 그대로 김칫국을 마시는 상황이 벌어진다. 전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우리가 특정 전공이 취업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지원해도 대학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우리의 고민은 모두 김칫국이 된다. 


이 전제를 가진 상태에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전공을 선택할 때 얼마나 취업이나 경제적 보상에 유리한가를 따진다. 내가 이 전공에 얼마나 흥미가 있고 이 전공을 공부하는 과정이 즐거울 수 있을지에 대해 묻는 것은 다음 문제다. 선택한 전공에 합격하기만 해도 다행이지만 보통의 경우 생각하지도 못한 전공을 얻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 적성에 맞을 거라 믿은 전공도 막상 들어가면 기대와 다른 학문을 만나서 당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전공을 가지게 되는 학생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 순간 이들은 생각한다. ‘과연 이러려고 지금까지 그렇게 애써가면서 공부를 했는가. 나는 왜 이 공부를 하고 있지.’ 애초에 전혀 생각하지 못한 미래에 도달했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냄새나 외양만 보고 먹어보지 않는 해산물처럼 우리도 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싫다고 치부하면서 가능성을 포기한다. 




자기 전에 생각날 거야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맛집을 찾아다닌다. 먹는 내내 감탄을 자아낼 만큼 만족스러운 맛집을 찾으면 또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간다. 누구나 다들 그렇지 않은가? 마침내 음식이 나오면 나는 음식을 먹기 전에 친구들의 반응을 먼저 살핀다. 만약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마치 내가 식당의 주인이 된 듯 속상하지만 반응이 좋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여기 오길 잘했지?”


만약 친구들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나는 애써 둘러대며 이렇게 말한다. “이거 진짜 자기 전에 생각날걸? 이따 밤에 카톡으로 다음에 또 오자고 하지나 마.” 그러면 어떤 친구들은 자기 전에 ‘전혀 생각 안 나는데?’라며 익살스러운 연락을 보내곤 하지만, 아주 가끔 잭팟이 터진다. 맛집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난 뒤 반응이 썩 좋지 않았던 친구에게 내가 ‘오늘은 어디서 뭐 먹을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친구가 대답한다. 

‘그때 거기 어때?’

내 내면의 세계는 폭죽과 함께 페스티벌이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한 번 맛본 음식이 별로라고 생각이 들면 다시는 찾지 않는다. 진로를 선택할 때도 이와 다르지 않은 상황들이 자주 발생한다. 사회초년생은 경험이 부족하다. 취미나 적성이라고 대답해도 1~2번 경험해 본 일이라서 몇 번 더 하면 질릴지 아무도 모른다. 잘한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의 경험을 토대로 이건 별로고 이건 좋다고 판단한다.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이 일은 나랑 맞지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하지만 어른들의 조언은 사뭇 다르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해준다. ‘지금 하는 일이 자신에게 맞는 일인지 파악하는 데 1년 어쩌면 2년에서 3년 정도는 투자할 가치가 있다.’ 인턴을 하더라도 적게는 3개월 길게는 연 단위로 진행한다. 인턴을 해도 감이 잡히지 않을 수 있는데 과연 우리의 짧은 경험을 온전히 믿는 게 맞을까? 짧은 경험에 대한 성급한 판단이 고정관념만 쌓지는 않을까. 처음 맛이 조금 별로더라도 막상 일하고 능숙해지면 생각이 자꾸 나는 맛집 같은 일과 직업이 어디에 있을지는 오래 투자하지 않고는 모른다. 그리고 저자는 다시 한번 고정관념만 쌓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구절을 선물한다.



"직장을 옮기거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하지 마.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라네. 자신을 검증해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시간을 갖는 거야. 그 기간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해.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삶의 달콤함도 얻을 수 없어. 성공에는 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야. 안전하고 좋은 패를 쥐고 있을 때 오는 게 아니고 말일세. 나 역시 많은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왔네. 그 위험들이 결국 모두 성공으로 이어졌노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그런데 그거 아나? 나는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네.“


많은 경우 첫 직장을 성공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마치 첫 직장이 실패하면 자신의 인생 전부가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첫 직장이 실패인지 아닌지는 관점의 차이다. 그리고 성공보다는 실패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싫어하는 일을 해봐야 그것이 싫어하는 일인 줄 알 수 있다. 싫어하는 일이 있어야 좋아하는 일을 싫어하는 일과 비교해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작정 싫다고 하면 피해버리지만 그 일이 우리에게 더 많은 깨달음을 줄 수도 있다.


많은 학생들이 완벽주의에 빠져 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탄탄대로가 되어야 하며 만약 한 가지 오차라도 생기면 인생의 오점을 남긴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오점인지 아닌지는 지금 판단할 일이 아니지 않을까. 첫 직장이 실패하고 다음 직장이 실패하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찾는 과정 자체는 성공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실패를 그 당시에 바로 정의 내리는 건 시기상조가 아닐까? 실패는 아직 결론이 나기 전까지 모르는 일이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이 있다. 대학생들은 첫 직장을 ‘성공적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공적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를 정의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즉, 무엇이 성공인지 모른다는 말이다. 아마 그 정의는 사회에 있는 모두가 인정하는 바로 그 ‘성공’일 가능성이 크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모두가 인정해주는 바로 그 성공 말이다. 


성공을 정의하는 시기가 바로 자신을 알아가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시기, 20대이다. 실패할 수도 있다. 처음 들어간 직장이 완전히 실패로 결말을 맺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인지 아닌지는 지금 판단할 일은 아니다. 진짜 실패는 내 능력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다가 시간이 다 흘러가 버리는 일이 아닐까. 


보통 일이 어렵고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낄 때 그 일이 능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게임을 해 본 이들은 모두 게임이 잘 풀리지 않거나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게임을 할 때 재미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막상 실력이 점점 늘거나 게임이 잘 풀릴 때는 재미있다고 말한다. 일은 이와 다르지 않다. 




문제의 본질은 사실... 


사회초년생은 자신의 성향, 자아를 포기하고 관습이나 세속적 성공을 좇아가는가? 자유가 무거워서 자신의 꿈과 자아를 던져 놓고 살아가는가? 자신의 주관을 잠시 덮어 놓고 꿈을 버려두고 꾸역꾸역 인생을 살아가는가? 지금까지 말한 바에 따르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내 주관을 포기하고 남이 기대하는 것을 쫓아가거나 그저 ‘되고 싶은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관련하여 존 스튜어트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이든 가족이든,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일에서만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만 관련된 일들에서조차도, 내가 무엇을 더 선호하고, 나의 개성과 성향에 맞는 것이 무엇이며, 나의 능력을 최고로 발전시키고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그런 것들 대신에, 그들은 나의 위치에 어울리는 것이 무엇이고, 나와 같은 지위와 경제적 수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것이 무엇이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심하게도) 나보다 더 나은 지위와 경제적 수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다.”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내가 가지고 싶은 지위나 재력을 달성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묻는다. 단순히 남들이 봐주었으면 하는 나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일들을 좇아간다. 지금까지 내용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사회초년생은 자신의 성향, 자아를 무시하고 관습이나 세속적 성공을 좇아가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아니다. 지금까지 그렇다고 생각해왔다면 그것은 어른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우리가 어른들의 관점을 주입받아 착각하고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더 정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의 진짜 모습에 대해 존 스튜어트 밀은 뒷 문장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들이 그들 자신의 성향에 맞는 것이 아니라 관습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을 선택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관습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 외에,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성향이라는 것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정신 자체가 노예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향을 무시하고 세속적 성공을 좇는 게 아니다. ‘자신의 성향' 자체가 없다. 자신의 성향 자체가 없이 그저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세속적 성공을 좇는다. 우리는 이미 자유 속에서 자아를 포기했고 노예 사고방식의 교육에서 주관을 쌓아보지도 못했다. 칭찬해주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럼 이제 이거 하면 되겠다’라고 누가 말하니 이걸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산업화 인력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스스로 고민한 기회가 없는 이상 나만의 성향을 찾은 경험이 없다. 따라서 단순하게 ‘공부를 잘하면 어떤 직업을 해야 해’라는 말로 포장된 관습적인 진로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성향 자체가 없는 상황이 문제다. 즉,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남들이 사는 대로 사는 방식 그 자체보다, 내 고유한 성향과 나의 뚜렷한 자아를 찾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단지 사회초년생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라.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른들에게 적용되는지를. 


이제 명확해졌다. 자아를 무시하면서 관습을 좇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무시하고 세속적 성공을 좇는 게 아니라 우리의 정신 자체가 노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고유한 성향 자체가 없다. 두 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우리는 사실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예도 아니고 왜 이 공부를 해야 해?” “우리가 노예도 아니고 왜 이 일을 해야 해?” “난 진짜 돈의 노예인가 봐”라고 조소하듯 말한 우리들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모른다.’

‘너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아무 생각도 없다.’ 


지금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미숙했던 우리는 남의 성향과 생각에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것에 길들여져 어느 순간부터 정신적 노예가 된다. 자립해야 할 때가 되었지만 우리는 이미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할 만큼 길들여졌다. 생각이 많은 사람을 병적으로 취급하는 요즘 시대에 생각이 적은 사람은 그와 반대로 단순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는다. 생각이 적은 사람은 무언가 ‘쿨’하고 깔끔하게 사는 듯한 이미지를 얻는다. 하지만 과연 생각이 적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만의 생각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히파티아는 말했다.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자. 왜냐하면 심지어 틀린 생각이라도 생각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아를 잃은 게 아니다. 잃을 자아가 생겨본 적이 없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기 위해 이제는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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