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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Aug 23. 2022

가치관이라는 이름의 장애물

페르소나의 부작용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내가 누구인지 모를 때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이다. 그 문제들 중에 20대가 체감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가면’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지만 우리는 그전부터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바로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사회적 가면이다. 사회에서 온전히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가면이 필요하다. 각각의 상황에 맞게 나의 모습과 약간 다르거나 완전히 다른 가면을 써서 내 감정과 에너지를 지킬 수 있다. 만약 집에서 쉴 때까지 밖에서 쓰는 가면을 써야 한다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에 걸릴 것이다. 반대로 밖에서 집에서의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사회생활을 온전하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면은 사회인들에게 필수 아이템이다. 페르소나는 분명 긍정적인 효과가 넘치는 훌륭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너무나도 짧은 이해만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가면을 쓰고 다니면 문제가 발생한다. 가면은 말 그대로 나를 가리는 도구인데 언젠가부터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지금의 모습이 ‘나’의 모습인가? 아니면 이 사람과 만났을 때가 진짜 ‘나’의 모습인가? 집에서 모습이 정말 ‘나’의 모습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20대는 그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가면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어떤 가면이 진짜 나의 모습인지 찾기 시작한다. ‘이 사람과 만났을 때 모습이 진짜 나인 것 같아!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은 거 같은데.’


가면은 무심코 사용한 것에 비해서 많은 감정 소비를 부른다. 특히나 가면은 나의 부족함이나 힘든 상황을 숨길 때 자주 사용하는데 가면 자체도 감정 소비를 일으키니 피해는 배로 누적된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지칠 때면 인간관계에 감정적인 의존을 하게 된다. 내 삶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외로움과 불안감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친한 사람들이 치유해주길 기대한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몇 번은 괜찮은 척 가면을 쓴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고민을 털어놓자니 내가 너무 무능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보다 가면을 더 두껍게 덮는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마치 <인간실격>에서 요조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우리는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숨기고 상대방이 잘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를 매일같이 벌이고 있다. 


가면을 쓰다 보면 상처받는 일이 많이 생긴다. 특히 ‘착한 친구 페르소나’를 쓸 때가 그렇다. 착한 친구 페르소나는 무조건 대답을 ‘괜찮다’로 일관하거나, 상대방 의견에 불만이 있어도 무조건 맞춰준다.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할 때 우리는 감정을 최대한 가면으로 숨긴다. 하지만 숨기는 감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눌려 있다가 쌓이고 쌓인 감정이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신기할 만큼 폭발적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새어 나오는 모습은 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신체적인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또는 상대방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그리 얄미운지 점점 듣기 싫어진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느껴 친구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러다 문득 상대방이 펀치를 날린다. ‘나한테 왜 그러냐’고 물으면서 말이다. ‘왜 그러냐고? 왜 그러냐고?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이 사람은 나랑 처음부터 엮이면 안 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고 단정 지어버린다. 물론 감정은 좀 낭비했지만 못된 사람 한 명을 내 인생에서 지웠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친구의 입장에서 이들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쌓아둔 불만을 다 토로하니 그동안 왜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가면이 이렇게 많은 부작용을 낳는 이유는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우리는 마치 자신이 가면을 잘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가면이 나를 조종한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가면을 쓰는 게 아니라 가면이 나에게 명령하기 시작한다.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해야 하고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말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로를 꾸미려고 애쓰며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또한 커다란 근심거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은 가식적이고 과시적입니다. 보여주던 것과 다른 모습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는 사람은 괴롭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보여주던 것과 다른 모습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는 것은 괴롭다. 하지만 그보다 괴로운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이다.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누구인지 완벽하게 알아야 하는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가면도 쓰면 안 되고 인생을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조차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당장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수는 없지만 다행히도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내가 누구인지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야 한다. 매번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그런데 평생 안고 갈 질문에 대해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감정 소모를 한다. 만약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평생 지고 가야 할 동반자라면,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한 감정 소비를 적당히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가치관의 속임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초년생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남들이 주입한 가치관을 자신의 가치관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단 한 번도 신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는데 주변 모두가 신발에 관심을 갖자 나도 신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비싼 신발을 신는 것이 성공한 사람이라는 가치관을 무의식적으로 주입받아 비싼 신발을 모으기 시작한다. 세속적 성공이 나를 가장 만족시키는 성공이나 가치관이라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이 가치관이 사실 남에게 주입받은 가치관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신발과 성공뿐만이 아니다. 음식과 취미, 진로와 직업,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어떤 생각을 대하는 태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남의 것을 그대로 자신의 정의라고 믿는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제이 셰티는 그의 저서 <수도자처럼 생각하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모, 친구, 교사, 미디어의 목소리는 젊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휘저으며 온갖 신념과 가치관의 씨앗을 뿌린다. 사회가 정의하는 ‘행복한 삶’은 모두의 행복한 삶인 동시에 그 누구의 행복한 삶도 아니다.”


대학생들은 특히 SNS 사용 시간이 많아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을 주입받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다. 아직 자신의 가치관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 휩쓸리기 쉽다. 가면과 마찬가지로 있는 그대로의 내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남들의 가치관에 조종당한다. 내 가치관은 가져본 적도 없지만 남의 가치관을 언제부턴가 나의 가치관이라 믿기 시작한다. 아직 발견하지도 못한 내 가치관은 남들의 가치관이라는 장애물에 의해서 더 꽁꽁 숨겨진다. 


이미 자신은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장애물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 장애물은 질문하지 않게 만든다. 이미 정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고등학생 때 그 후의 계획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왜 취업을 하기 전에 그 후의 계획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는가? 이미 계획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완벽한 정답에 맞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지금까지 하기도 싫은 공부를 해왔는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냐고 불평불만을 쏟아부으면서도 계속 공부를 했는가? 그런 와중에도 이 공부가 분명히 내 미래에 가능성을 넓혀줄 것이라는 남들의 입김과 남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장애물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정답이나 얄팍한 믿음 그리고 허울뿐인 계획, 그것은 오히려 장애물이다. 


우리는 왜 자아를 던져두면서까지 자유를 포기하였는가. 우리는 어떤 이유로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해야 더 빠르게 이 일을 끝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꾸려 드는가. 장애물이 나에게 질문하지 않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장애물은 이미 확실한 나만의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항상 얄팍한 믿음과 장애물이 더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 


어떻게 내가 누구인지 대답하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나의 경험을 곱씹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단순하게 경험을 하고 끝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내가 화가 났다면 왜 화가 났는지, 내가 왜 충격을 받고 회의감을 느끼며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등등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그것이 바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대답들을 알아내려면 일단 무엇에 답할지부터 알아야 한다. 무엇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관심을 가지는 시작이다. 대답하기 전에 어디에 대답해야 할지 찾아야 한다. 


두 번째로, 지금 백지를 펼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써본다고 가정해보자. 지금 우리의 목표는 나에 대한 글쓰기다. 하지만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고 어떠한 경험에 대한 사색도 없다면 우리는 쓸 내용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만 매달려 있으면 백지는 어떠한 글도 채우지 못하고 초라해진다. 


따라서 나에 대한 이해는 바깥에서 얻어야 한다. 바깥의 경험을 곱씹어 보며 나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경험과 사색을 해나가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얻거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보면서 알아채는 순간도 있고, 자신의 책장을 보면서 깨달을 수도 있다. 또는 스스로 사색하고 자기 자신과 토론하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20대는 이런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대답에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게 정상적이고 당연하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관심을 가지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다르지 않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써본다고 가정해보자. 아무 내용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해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세상에 눈을 돌려야 한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호기심을 키우는 시작이자 이 질문에 관심을 가지는 방법이다. 



‘탐색/이용 균형’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탐색하는 노력과 ‘무엇’을 하는 이용 노력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시간의 8~90퍼센트는 이용을 하며 경험하고 재료를 얻는 데 쓰고, 남은 10~20퍼센트의 시간을 탐색하는 데 쓰는 것이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다. 따라서 하루 8시간 일한다면 1시간 정도는 탐색의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방구석에 갇혀서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100% 시간을 탐색의 노력에만 투자하겠다는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아니 비효율적인 방법을 넘어서 애초에 불가능한 방법이다.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판단력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상황을 판단하고 대답을 발견해야 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방법, 그것은 판단력에서 비롯된다. 지금 상황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자 하는지 알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능력은 질문을 던지는 연습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판단력을 기르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죽을 때까지 고민하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죽을 때까지 고민해야 한다. 내가 가진 판단력으로 미루어 짐작하고 항상 내가 가진 최선의 가설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판단력이 없다는 문제보다 시급한 문제는 우리가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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