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아가라는 텅 빈 조언

by 보로미의 김정훈

20대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가?’이다.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보통 이 스트레스는 미래의 불투명성으로 찾아오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대답이 나를 등대로 삼아 생각할 때 도무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역시 알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대답을 떠올리려고 하면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정확히 무엇을 대답해야 하는지 모를 만큼 범위가 넓은 질문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니 사실 수많은 대답이 떠오르는데,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최근 MBTI가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MBTI검사의 결과는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간편한 대답으로 쓰인다. 나는 이 유행이 젊은 세대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는다. 조금 더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당신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나요?”, “당신이 잘하는 건 무엇이 있나요?” 만약 정말로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으면 우리는 보통 이름을 묻거나 자기소개를 간단히 해보라는 정도로 이해할 따름이다. 상대방이 나의 정체성을 묻는다거나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어떤 질문이라도 나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면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만 고민을 하다보면 최소한의 대답은 나온다. 좋아하는 음식을 물으면 “라면이요.”라고 답하거나 무엇을 잘하냐고 물으면 “잘하는 거 없는데요.”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때 ‘라면’이나 ‘잘 하는 게 없다’는 대답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고 꼬이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


정체성이라 하면 누군가는 습관의 집합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으며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남이 바라보는 나’가 바로 정체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어떤 말이 정답일까?


예를 들어보자. 여기 A라는 사람이 있다. A는 자기 스스로가 남을 잘 웃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이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A의 정체성은 ‘웃긴 사람’이다. 하지만 A의 친구 B가 보기에 A는 전혀 웃기지 않다. 오히려 따분하다. 그럼 ‘남이 바라보는 나’를 정체성으로 정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A는 순식간에 따분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A는 끈질기다. A는 B를 웃기려고 애쓴다. 아무리 웃겨도 B가 웃어주지 않자 A는 슬슬 B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점점 A는 B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웃길 때도 점점 남의 눈치를 보는 버릇이 생긴다. 그러면 정체성을 ‘습관의 집합체’로 보는 사람에게 A는 남의 눈치를 보지만 계속 웃기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른 대답이 나오는 것처럼, 정체성 역시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같은 상황에서도 수많은 대답이 나온다. 따라서 정체성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훌륭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 과정에서 ‘나’를 정의하는 것은 그야말로 최대의 난제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대답은 수만 가지가 될 수 있다. 자주 입는 옷을 말해주며 설명할 수도 있고, 내가 기피하는 사람은 어떤 부류인지에 대해 말하며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경고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은 우리에게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쓸 수는 있겠지만 이런 대답은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단서를 주기에 부족한 느낌을 준다. “앞으로 뭘 하고 싶니?”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쓰기에는 너무 초라하다는 뜻이다.


지금 하는 일을 말해주며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려 들면 종종 곤란해진다. 나조차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모르거나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 내가 하는 일은 나를 설명해주지 못하는 느낌이 때문이다. 따라서 20대 초반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무언가 거대하고 거창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다.




나답게 살아가라


어른들은 종종 청년들에게 ‘나답게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뭔가 대단한 조언 같은 느낌은 들지만 나답게 살아가라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질문과 대답이 바로 우리가 찾는 그 거대하고 거창한 ‘나는 누구인가?’가 아닌가. 나답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어른에게 ‘그러면 저는 라면을 좋아하는데, 라면을 좋아하듯 살아가라는 말은 혹시 어떻게 사는 건가요?’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런 조언은 모두 뻔하고 번지르르한 사기가 된다. 너답게 살아가라는 말. 너의 꿈을 좇으라는 말, 너의 열정을 좇으라는 말, 모두 사기다. 아직 우리에게는 열정이나 꿈은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혀 쓸모가 없고 소장가치가 없다.


20대 초반에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나는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 ‘나는 누구인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그 어느 것도 대답하지 못해서 절망스러운 상황에 위로 전문가들은 ‘지금 그대로도 충분해. 잘 하고 있어.’라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처음 한두 번은 위로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정말 이대로 충분한가?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데 정말 이대로 충분한가? 정말 잘하고 있는 게 맞나? 이대로 살고 싶지 않은데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다는 말은 그야말로 쓸모가 없었다. 어이가 없었다. 뻔한 위로는 점점 나를 놀리는 말처럼 들렸다.




당연한 사실에 대하여


사실 20대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짧은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위해 이제 막 성인이 된 대학생 C를 예시로 들어보자. C는 지금까지 하라는 공부 말고 한 게 없다. 쉴 때는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고 친구들이랑 놀며 지냈다. 그 이상 특별한 일은 없다. 그런데 갑자기 20살이 되어서 미래를 구상하기 시작하자 점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그는 지금까지의 짧은 경험으로 얼마나 많은 ‘나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까?


20대 초중반의 경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희소한 자원을 바탕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잘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는 현실 역시 지극히 정상이다. 아직 잘할 수 있을 만큼 무언가 오랫동안 흥미를 가지고 시도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어 설계는 보통 잘하는 것을 토대로 미래를 결정해야 하니까 그렇게 머리가 복잡할 수가 없다. 취미나 특기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야 하며 20대는 특기와 취미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나 자신을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 누구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속앓이를 하고 자존감이 떨어질 일은 없지 않을까? 또한 취미가 없는 사람이 ‘내가 비정상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현실, 특기가 없는 사람은 무능하고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현실 역시 많은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도록 받아들이게 조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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