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이 꿈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평범하자는 꿈은 태어난 이상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볼 때 다양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적으로 보았을 때 역시 매 순간 각자가 다른 상황을 마주한다. 비록 같은 상황을 마주했더라도 그동안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모두가 다 다르다. 숨을 쉬고 있는 순간 우리는 절대로 평범해질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완벽해지고 싶다는 이상처럼 실현이 불가능한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자아를 던진 사람들끼리 뭉치는 것이다. 모두가 좇는 가치관을 이유도 없이 좇는다면 어렵지 않게 평범해질 수 있다.
자아를 포기한 자가 다시 원래의 인생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자발성을 갖추고 자아를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추락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이 선제적인 노력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주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길을 찾기 위한 질문이다. 자기 스스로 어떤 인간상을 갖추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지닌 질문이다. 하지만 이에 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남들이 제시한 길만 따르게 되면 우리는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길로 향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본능이 없다.’ 우리는 원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해야 한다고 믿는 그 모든 일은 당연하게도 내 과거의 경험과 사색의 산물이다. 그 말인 즉, 과거의 경험과 사색의 산물이 부족한 사회초년생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알만한 재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더 많은 경험과 사색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소중한 단서가 된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면 바보가 되는 지금 현실에서 우리는 숨기 바쁘다. 따라서 경험과 사색을 포기하고 성급하게 확실한 길을 선택한다.
졸업이 다가오면 스펙을 쌓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사람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분위기인 탓에 대학생은 속도에 집착하기 좋은 환경에 있다. '현실적으로' 준비해야 할 모든 문제들이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확실한 미래를 꿈꾸고 있어 보일 때 나도 얼른 뭘 해야 할지 정하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참을 수 없는 실망감을 느낀다. 점점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양한 도피처를 찾기 시작한다.
젊은이들은 매일같이 ‘힐링’을 일삼고, SNS에 빠져 산다. 술자리를 찾아다니며 사는 젊은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제 막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한 사회초년생들은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안정을 찾는다. 잘못된 현상은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하루 내내 하는 일도 없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데도 그 누구보다 지친다. 그래서 항상 여행이나 주말의 나들이를 꿈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서 위로를 받는다.
나는 이것이 궁금했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도피처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왜 우리는 힐링을 찾아다닐까? 내가 오랜 시간 고민하고 공부한 결과 우리가 도피처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답하지 못하고 결국 그 질문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미를 성취하려는 본래의 관심이 좌절되었을 경우에만 인간은 권력에서 만족을 찾거나 쾌락에 집중하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르게 해석하면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나 삶의 요소는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은 묻는다고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이 대답이 나올 때까지 많은 생각과 노동,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점점 피곤함을 느낀다. 한때는 이 질문에 엄청난 감정적인 에너지를 쏟으며 관심을 가지다가도 대답이 빨리 나오지 않자 관심을 접어둔다. 그런 와중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왜 이러고 살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때부터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의미가 있을지 찾는 노력을 멈춘다. 어려운 말로, 의미를 성취하려는 본래의 관심이 좌절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럴 때 쾌락에 집중하고 권력에서 만족을 찾는다.
사치스러운 물건을 동경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에서 만족을 느낀다. 남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사치품을 보면서 인정해주는 그 쾌감을 즐긴다. 술자리를 자주 찾는다. 현실을 잊고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약속만 찾게 된다. 매일 ‘힐링’이라며 여기저기 쏘다닌다. 이렇게 신나게 놀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이들은 다시 고독해진다.
이 시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다. 따라서 그 시간을 피하고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휴대폰을 집어 들고 SNS를 켠다. 자기 전까지 SNS에 빠져 산다. 자신이 산 사치품을 SNS에 올리고, 친구들과 노는 모습을 올린다. 그러다 가끔 심각성을 느껴 SNS를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 삭제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한다. 혹시 무슨 일 있냐며.
식습관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다. 전보다 음식의 양이 늘고 음식 소비에 지출 비중이 높아진다. 정신적인 건강 문제가 어느덧 신체적인 건강까지 해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지출이 너무 많아져서 돌이킬 수 없는 빚에 허덕이기도 한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오히려 더 쾌락에 집중하며 생각을 지워 버린다.
권력은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 같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 항상 녹아들어 있다. 의미를 성취하려는 본래의 관심이 좌절된 이들은 좌절감을 느끼는 시기에 친구들에게 감정적인 의존을 일삼는다. 친구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다른 친구들과 더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라는 의미에서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인다. 화난 척하거나 심한 경우 연을 끊은 척하는 횡포를 보인다. 그러면 상대방은 다시 나를 모신다. 다시 나를 존중해주는 친구들을 보며 안심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명성과 지위 역시 마찬가지다.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어떤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지 찾기 시작한다. 듣기만 해도 어깨가 차오르는 명함을 주는 기업이나 전문직은 무엇이 있는지부터 생각한다. 아니, 생각할 필요도 없다. 거의 대부분이 좇고 있는 길이 바로 그 길이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어느덧 권력의 성취가 된다. 남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결과만이 관심사일 뿐이다.
이렇게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동기부여’나 ‘위로’라는 처방전을 받는다. 이런 처방들은 모두 당장 행동이나 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더 열심히 살기를 요구하거나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조언한다. 스스로를 못살게 구는 행동을 멈추고 칭찬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말한다. 모질게 굴지 말고 친한 친구에게 하듯이 스스로를 토닥이라고 조언한다. 동기부여를 받는 순간만큼은 내가 잘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 약들은 얼마 가지 않아 금방 약발이 떨어진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태도와 행동만 바꾸려고 들면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동기부여라는 처방전을 받는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학생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먼저 첫 번째 부류는 일시 정지 타입이다. 이들은 왜 해야 하는지 모르면 하지 않는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어려운 말로 개연성을 중시하는 타입인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미래에 도움이 된다거나 최소한 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을 왜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때 강제성이 없는 경우 완전히 손을 놓아 버린다. 방구석에 누워서 SNS만 주구장창 한다. 누워 있으면서 불평과 불만을 멈추지 않는다. 이번 생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미 굳혀진 부정적인 습관 아래에서 허우적댄다. 처음에는 스스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지만 이후에는 그 습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자발적으로 뛰어든 일시 정지 바다에 가라 앉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좀비 타입이다. 이들 역시 첫 번째 부류와 마찬가지로 왜 해야 하는지 몰라서 항상 회의감과 삶에 대한 공허함에 찌들어있다. 하지만 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온 것을 일단 한다. 단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걷고 있을 뿐이다. 또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찌됐든 도움이 된다고 믿으며 걷는다. 하지만 걸으면서 불평과 불만을 멈추지 않는다. 삶에 대한 푸념을 달고 살면서 꾸역 꾸역 앞으로 걸어 간다.
서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일시 정지 타입의 사람들은 좀비 타입의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하기도 싫은 걸 저렇게 꾸역꾸역할 수가 있지? 저 사람들도 진짜 독하다.’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좀비 타입의 사람들은 일시 정지 타입의 사람을 보며 ‘어떻게 저렇게 놀고만 있을 수 있지? 지금까지 한 게 아깝지도 않나?’라고 생각한다.
두 부류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는 서로를 못마땅해한다. 분명 보이는 모습은 다르지만 그 근본은 같다. 두 부류 모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또 두 부류는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바로 도피처다.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유하고 도피한다.
많은 이들이 일상적으로 받는 처방들은 모두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일시적인 해결책도 반복되면 더는 먹혀들어 가지 않는다. 내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달라고 외친다. 사치품을 빚을 지면서까지 더 많이 사기 시작한다. 단순한 힐링으로 시작한 일탈이 완전한 일상이 되어버린다. 동기부여 영상을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불평과 불만이 없이 지나가는 하루는 존재하지 않는다. SNS를 1시간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주말이 기다려지는 삶을 산다. 점점 처방에 의존하게 되고 조종당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증상에 집중한다. 증상에 대한 해결책만 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까지 처방받은 약은 결코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가 지속해서 처방전을 받는 이유는 이 방법 이외에 다른 해결방법은 모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문제가 생겨서 보이는 증상은 증상을 치료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증상을 만드는 근본적 결함이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즉,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우리에게 노출되어 있는 조언들과 힐링, 처방들은 모두 일시적인 치료제에 불과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절망감을 잠시 잊게 해주는 정도다.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행동과 태도만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 행동과 태도가 나왔는지부터 알아보고 그 근본에 있는 뿌리를 잘라서 새로운 나무를 심어야 한다.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왜 우리가 이렇게 쾌락을 좇고 권력과 명성에 눈이 멀었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관심의 좌절이다. 막막하고 답답한 질문과 싸우다 지친 우리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도피처를 찾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가 지쳐있고 힘들다는 의미다.
일시적인 처방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용기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다시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기는 일시적이고 위험하다. 언제 다시 사그라들지 모른다. 그러니 관심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어떻게 관심을 주어야 하는지 모른다. 단지 질문만 매일같이 내뱉는다고 관심을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깨달았다. 똑같은 질문을 매일 똑같이 내뱉고 얻은 결과는 관심의 포기였다. 도대체 어떻게 관심을 주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