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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수 Feb 23. 2023

번역의 세계로... 결국 예비된 곳으로...

나의 번역 이야기 1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참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요즘처럼 취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대학이 지금처럼 많지 않을 때여서 서울에서 웬만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적당한 졸업 평점에 토익이나 토플 성적표가 있으면 10대 대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괜찮은 직장을 구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IMF가 터지고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기존의 평생직장 개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설상가상으로 대륙의 바람이 몰아치고 기업들이 앞다투어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가뜩이나 부족하던 일자리는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그 후로 우리나라의 경제는 피고용자의 삶보다 기업의 이윤 불리기를 우선하는 구조로 변모해 왔다.

  나는 이 시기에 번역을 시작했다. 다니던 직장이 있었고 금융권이라 연봉도 높았지만, 일은 마음에 들지 않고 저녁마다 반복되는 술자리에 젊은이의 눈빛은 점점 썩은 동태 눈알로 변해 갔다. 그렇게 일 년 만에 사표를 던졌다. 취업이든 자영업이든, 내 자존감을 지키며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일거리를 찾고 싶었다. 그때가 IMF 이후였다면, 어쩌면 나도 회사를 그렇게 쉽게 박차고 나오지 못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잘난 것 하나 없으면서도 뭘 하든 굶기야 하겠냐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번역이라는 세계에 뛰어들었고 지난 20년 가까이 50권가량의 도서 외에도 다양한 저작물을 번역했다. 번역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며 내 길을 만류하던 사람들도 요즘은 어떤 책을 번역하느냐며 먼저 묻곤 한다. 스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임에도 먼저 번역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강연도 여러 번 했고, 번역서가 출간되면 가까운 지인들 중에서 그 책이 도움 될 만한 사람들을 골라 선물도 한다.

  내 나이도 어느덧  쉰을 넘었다. 그동안 넉넉히 벌지는 못했지만 번역과 관련된 일에서 얻은 수입으로 아내와 두 딸과 그럭저럭 먹고살고 있다. 십여 년 전엔 연세 많은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이사 온 덕분에 조금 더 넓은 집도 살 수 있었다. 이렇게 서울과 멀리 떨어져서 일할 수 있는 것도 번역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를 더 뿌듯하게 하는 것은 거실 책장에 가득 꽂혀 있는 번역서들이다.

  활자의 매력!

  직업마다 고유의 매력이 있겠지만 번역이 가져다주는 외형적인 장점의 하나가 바로 활자의 매력이다. 내 이름이 적힌 책은 나의 존재감을 한껏 높여준다. 누구를 만나더라도 책 한 권 내밀면 사람을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이것이 활자의 매력이다.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번역이라는 직종도 사회에서 충분히 명예로운 분야임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그 책들이 나보다 오래 살 거란 보장은 없지만, 단 몇 년이라도 나라 곳곳에서 내 이름을 사람들의 눈에 각인시키는 역할은 해 줄 것이다.

  이른바 스카이를 졸업한 학생들조차도 취업 때문에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눈높이는 옛말이요, 훌륭하다는 대학을 졸업하고 온갖 자격을 갖추고도 마음에 드는 직장은커녕 안정된 일자리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출판계도 오래전부터 번역서 비중을 많이 줄여왔다. 이처럼 먹고 살기 어려운 이 시대도 나의 글을 쓰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한창 일할 청춘들에게 내가 몸담은 분야를 알리는 것도 나름 보람 있는 일일 게다. 그래서 한 명이라도 이 분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지금 번역에 관심 있는 청춘들, 그리고 앞으로 관심을 갖게 될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썼다. 여기에는 내가 번역계에 입문한 과정과 그동안 일하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나는 초보 번역가들의 반면교사가 되려 한다. 준비도 없이 얼렁뚱땅 번역을 시작하여 아찔한 시행착오를 숱하게 겪어 온 나의 번역 인생이, 이제 막 이 세계에 발을 들이려는 청춘들에게 유익한 참고 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번역을 정식 직업으로 여겨도 좋고 아르바이트로 생각해도 좋다. 번역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나의 이야기가 타산지석이 되어 주길 바란다.


나의 번역 입문기 


  “번역이라고? 그거 아르바이트 아냐?”

  서른 가까운 나이에 번역가가 되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나의 이십 대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서울에서 괜찮다는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다는 직장에 취직했지만 채 일 년을 버티지 못했다. 연봉도 높았고 대기업이어서 도전의 기회도 많으리라는 이유로 선택한 직장이었지만 도무지 일에 흥미를 붙일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그저 시간 때우기였고, 이렇게 사는 것은 젊음을 낭비하는 일 같았다. 게다가 한 번뿐인 인생인데 누군가의 피고용자로 사는 것보다는 나와 가족을 위하고, 가능하면 이 사회에도 남다르게 기여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나와 친구와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말이 좋아 사업이지 밑천도 얼마 없는 우리에게는 보따리 장사와 다름없었다. 농산물을 산지에서 구입해서 도시에 내다 파는, 이른바 농산물 차떼기 장사였다. 옷가게를 운영하시던 부모님을 보며 자란 탓인지 나는 장사에도 조금은 관심이 있었다. 퇴사하여 시간도 많던 차에, 예전부터 장사를 해보자던 친구의 제의로 별 고민 없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론 오래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젊은 날의 경험 정도로 여기고, 하는 동안만큼은 최선을 다해 보기로 다짐했다.

  그 후 일 년 가까이 트럭을 몰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밤잠도 아끼며, 졸음운전을 참아가며 열심히 일했지만 애당초 전략 없이 섣부르게 시작한 일이라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결국 우리는 깔끔하게 망했다. 가진 것도 없이 시작했기에 망했다는 것보다는 좋은 경험을 했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게다. 그때 같이 일했던 친구는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세무사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렇게 몇 번의 경험을 하면서 나이도 두세 살 더 먹었고, 이제는 정말 내 인생을 바칠 만한 일이 무얼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렸을 적 내 꿈은 시인이었다. 놀라운 재능까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시에 관심이 있었고 글도 곧잘 썼다. 그래서 백일장에 나가 상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도 시인이나 작가는 배고프다는 말의 뜻을 이해했고, 결국 시인은 유년기의 꿈에 그치고 말았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나는 국어와 영어에 꽤 능숙했다. 국어야 우리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영어를 왜 즐기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언어 감각이 조금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일어 수업을 신청했다가 D 학점을 받은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학창 시절에 영어 문법책 서너 권을 통째로 외웠고, 그러다 보니 영어라는 언어의 전반적인 개념이 저절로 잡혔다.

문학과 영어!

이 두 영역을 조합하니 번역가라는 직업이 튀어나왔다. 좋은 책을 멋지게 번역하여 내 이름으로 출간한다면, 이 사회의 지성에 기여하고 나의 명예도 높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이 정도의 대의를 가진 직업이라면 평생을 바칠 만하다고 판단했다.


준비 없이 무모하게 달려든 불나방 ... 


이제 방향은 정해졌다. 그런데 번역가로서의 준비는 둘째치고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이때는 90년대 후반이었다. 한국에는 PC 통신이 등장하고 인터넷이 태동하고 있었지만 컴퓨터도 없는 기계치였던 내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내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는 사람과 책이 전부였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로서적이었다. 대형서점 두어 곳을 다니며 번역과 관련된 책들을 뒤졌지만 번역가를 준비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한 책은 거의 없었다. 속된 말로 맨 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나네 집에서 PC 통신에 접속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찾았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번역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알고 보니, 작은 번역회사에서 초벌번역가를 모집하여 교육을 해준다는 핑계로 수강료를 받아 챙기는 그런 광고였다. 뭔가 미심쩍었지만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에 남영동에 있던 그 회사로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교육 내용을 설명하는 부장이라는 사람의 말투에서 장사꾼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직감적으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석 달에 육십만 원을 내고 교육을 받으면 일감을 받아 번역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어차피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그 정도의 금액으로 교육을 받고 번역을 시작할 수 있다면 크게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사람이 모여 그 회사의 관계자와 매주 두 차례씩 세미나를 시작했다. 말이 세미나지, 영어 원문 몇 장을 받아 각자 번역해서 발표하고 교정하는 간단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회사 사정을 핑계로 세미나를 중단한 것이다. 사장을 찾아가 수강료를 돌려달라고 했더니, 역시나 사기꾼 포스의 그 사장은 앞으로 일감을 줄 테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순진했던 나는 또 그 말을 또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렇게 몇 장 짜리 서류를 이따금씩 받아 번역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아 그 회사는 사라졌다. 그때 그 번역회사의 사장은 머잖아 큰 번역회사를 설립하고 대표가 되었다. 얼마나 유능한지는 몰라도 거의 매달 번역서를 출간하며 방송가에도 가끔 보이는 듯하더니 10여 년이 지난 후에는 회사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한 달 수입 3만 원 


아무튼 나는 그 회사에서 일하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 직원과 계속 줄을 대어 일을 했다. 일감도 적었고 보수도 형편없었지만 번역가로서의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 계속 일을 주는 것이 고마워 배운다는 생각으로 나름 열심히 일했다. 그때(1999년 무렵) 내가 받은 번역료는 원고지 한 매를 기준으로 700-800원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의 1/5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많이 받기는 어렵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다.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세상에 법도 필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 달에 3만 원 남짓 벌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창 열정이 타오르던 때라 책임감 있게 일하다 보니 일도 조금씩 늘어났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한역보다 단가가 높은 영역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수입은 조금씩 늘어났고 단골 거래처도 생겼다.


‘World Wide Web’전 세계적 그물망으로 


내가 번역 일을 시작한 시기는 바야흐로 IT 붐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절이자 박세리 선수가 하얀 발로 US 오픈을 제패하며 국민의 힘든 삶을 위로하던 그 무렵이었다. 그래서 IT 업종과 관련된 문서도 꽤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기억도 많다. 내 번역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오역의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소름 돋게 하는 오역이 바로 ‘WWW’였다. 인터넷이 뭔지 몰랐던 나는 ‘World Wide Web’을 ‘전 세계적 그물망’이라고 멋지게(?) 번역하여 납품했다. 표제어와 다름없는 단어를 그렇게 번역했으니 본문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그러고도 번역료를 받았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웠다!

그 무렵에 많이 했던 일 중의 하나는 미술 작품의 평론을 영문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미술 평론은 워낙 고매한(?) 한자 표현이 많아 한글로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글을 실력도 없는 내게 영작하란다. 당연히 받지 말아야 할 일이었지만 일감이 들쭉날쭉하던 나로서는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아하고 고아하며 청아한 표현들을 영어 사전을 뒤져가며 역시 멋지게(?) 영작하여 납품했다. 그러고 또 번역료를 받았다. 역시 노력하는 자에게는 하늘이 보상을 주나 보다.

하지만 하늘은 잠시 미룰지언정 죗값은 꼭 치르게 한다. 평론 번역을 납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업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를 좀 보잔다. 그래서 찾아갔더니 호주 출신으로 한국말을 나보다 더 잘하는 여자가 날 부르더니 이런 번역은 어떤 외국인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잘 아는 당신이 하지 그랬어요?’ 그러고는 나더러 번역료 절반은 내놓으란다. 마음 같아서는 몽땅 되돌려 받고 싶지만 고생한 흔적이 엿보여 절반만 달라는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나 보다.


번역회사를 만나다 


이렇게 아찔한 경험들을 일 년 가까이하던 와중에 본격적으로 번역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지금이야 국내에서 제법 큰 규모에 속하지만 당시만 해도 작은 구멍가게에 지나지 않았던 OO코리아라는 번역회사를 만났다. 내가 어떻게 그곳을 찾아가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암튼 그 회사에서 작은 문서들을 받아 조금 더 안정적으로 일하게 되었다(번역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나름 공신력 있는 회사를 찾아가 테스트를 받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초짜 번역가라 번역료는 말 그대로 쥐꼬리였지만 일이 조금 더 안정적이라는 점에서 예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돈은 크게 생각지 않고 그저 성실하게 몇 개월을 보내다가 운 좋게 사장님의 추천으로 책을 한 권 소개받았다.

출판 번역의 분야는 다양하다. 아동용 동화나 만화에서부터 성인들이 읽는 인문, 문학, 경영, 경제, 자기 계발, 역사, 실용서 등 인터넷 서점의 카테고리 대부분이 번역에도 해당된다. 그중에서 나는 경제경영서와 자기 계발 부문을 택했다. 나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며 심리학과 경제학 등 몇몇 분야를 관심 있게 공부했다. 덕분에 특별한 준비 없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쪽이었다.

번역의 꽃은 역시 도서다. 번역회사 사장님에게 소개받은 책은 리더십 서적이었다. 일 년 넘게 우여곡절을 겪은 내게 그때의 희열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이름으로 책을 출간할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번역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 경력도 없는 내게 책을 낼 기회를 준 출판사 사장님이 그저 고맙고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처럼 해보세요.” 


첫 원서를 받아 열심히 번역하다가 번역회사 사장님을 만났을 때였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아직 번역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더니 사장님이 한마디 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처럼 해보세요.” 무심코 던진 말이겠지만, 그 한마디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엇이 좋은 번역인지에 대해 그동안 해온 숱한 고민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며 머릿속의 안개가 싹 걷히는 느낌이었다. ‘그래! 한국 작가가 쓴 책처럼 자연스러우면 되는 거야.’ 그 작은 사건은 내 번역 인생의 방향을 재설정해준 소중한 계기였다.

그때부터 일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독해 중심의 번역 작업이 이제는 우리식 표현 중심으로 바뀌었다. 시원찮은 실력 탓에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조차 여전히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떤 것이 좋은 번역인지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웬만큼 진도가 나가면 남이 쓴 글이라 생각하고 다시 읽으며 영어식 어투를 우리식으로 바꿨다.

두 달 가까이 작업하여 책 한 권을 무사히 끝냈다. 『21세기 리더(1999)』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에는 새 시대를 살아가는 리더에게 필요한 덕목과 개념들을 사전 형식으로 정리되었다. 모든 장(章)이 각각 독립적인 내용이어서 초보 번역가인 나 같은 사람에게도 큰 부담이 없었다. 어떻든 번역을 끝내고 나니 번역본에 대한 반응이 무척 궁금했다. 많은 고민을 하며 최선을 다해 작업을 했지만 처음인 만큼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편집자들에게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저 무난하다는 말만 돌아왔다.


대형서점 판매대에 놓인 나의 첫 번역서 


얼마 후, 드디어 내 인생의 첫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번역을 시작한 지 거의 일 년 만이었다. 파란 표지에 하얀 글씨로 적힌 내 이름 석 자는 정말 감동이었다. 당장 광화문의 대형서점으로 달려갔다. 내 책이 서점에 진열된, 또 하나의 감동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웬 책들이 그리도 많은지 나의 역작(?)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별로 중요한 책이 아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던 중에 파란 표지의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바닥에 놓인 게 아니라 신간 진열대 위에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위용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그때 또 하나의 감동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바리코트를 입은 중년 신사가 내 책을 유심히 읽고 있는 게 아닌가! 번역의 보람을 실감하는 첫 순간이었다. 첫 번역서의 특별한 감동 때문인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장면이 스틸컷처럼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이렇게 첫 역서를 무사히 탈고하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자 두 번째는 기회는 아주 쉽게 찾아왔다. 번역회사에는 당연히 책이 많다. 하지만 책의 수보다 그 책을 번역하고 싶어 하는 번역가들이 훨씬 많다. 그 많은 번역가들 중에 책을 손에 쥐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믿고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가에게 납품 기일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납기일과 번역 품질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제대로 하자는 쪽을 택했다.

번역 단가도 낮은데 납기일까지 늘리면 뭘로 먹고 사냐고 되물을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사실 납기일은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번역가는 시장에서 도태된다. 내가 그랬다. 나는 독해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많은 번역가들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버틸 수 -버텼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있었던 이유는, 제대로 이해한 후에 깔끔한 문장으로 만들려고 노력한 덕분이다. 출간 일정이 특별히 빡빡하지 않은 다음에야 어느 출판사나 약간의 여유를 갖고 일한다. 그래서 나 같이 번역이 늦은 사람은 계약 당시에 시간을 여유 있게 하든지, 아니면 번역 도중에 미리 출판사에 연락하여 일정을 협의한다. 납기일도 맞추고 번역도 뛰어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시간보다 품질을 우선해야 한다(물론 일정 조정이 가능한 상황에 한하여). 시간은 조정할 수 있지만 품질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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