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조선 9대 왕이며 성군인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이정)이 지은 시조이다. 전형적인 풍류가이자 낭만적 강호한정가로 알려진 작품이지만, 나는 이 시조를 대할 때마다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이 책 ‘스페어’를 번역하며 해리 왕자에게 느낀 감정과 흡사했다. ‘가엾은 해리(Poor Harry!)’
월산대군은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도 온화하여 주변의 칭송이 높았지만, 신체가 허약하고 심성이 유약한 탓에 동생 자을산군에게 왕위가 넘어갔다고 한다. 자을산군이 어려서부터 세조를 비롯한 왕실 어른들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학문적 소양과 성품도 뛰어나 왕위를 이었으리라는 설명은 물론 타당하지만, 그의 장인이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한명회였다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형은 왕이 된 동생을 향해 불만 없이 올곧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며 극도로 조심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도 이런 형의 삶을 존중하고 지극히 보살폈다고 하니, 정략으로 점철된 우리 왕조 역사에서 그리 흔한 모습은 아닌 듯하다.
번역하기에 쉬운 책은 없지만, 이 책은 작업하면서 부담이 특히 많았다. 지금껏 번역한 50여 권 모두가 내게는 소중하고 사회적 지성에도 기여하는 좋은 책들이었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조심스러웠다. 워낙 화제성이 크고 판매량도 어마어마한 탓에, 사소한 번역 실수로 자칫 이 책과 출판사와 나의 이력에도 흠집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작이 등장할 때마다 번역 오류를 지적하는 독자들의 매서운 눈초리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독자들이 번역가의 작업 환경과 입장까지 고려하는 경우는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므로, 이 책의 번역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약 420페이지의 원서 분량은 일반적인 도서의 두 배가 넘는 데다, 영국 왕실의 부분적 역사와 해리 왕자의 출생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분야를 다루고 있어 번역의 폭도 그만큼 넓었다. 특히 여러 부문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관습적 표현들을 실제에 맞게 일일이 검색하여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 해리 왕자의 자서전 ‘스페어’가 출간 첫날인 11일(현지시간) 영국·미국·캐나다에서 사 전 예약주문
을 포함해 143만권 이상 팔렸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1일 보도했다.
‘스페어’를 출판한 펭귄랜덤하우스의 래리 핀레이 이사는 이날 “판매량이 우리의 가장 낙관 적인 기대치도
뛰어넘었다”며 “우리가 아는 한 첫날 이보다 더 많이 팔린 책은 다른 해리 가 등장하는 책(해리 포터)뿐이
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2013년 1월 13일자)
이 책은 영국 왕실의 차남인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의 자서전이다. ‘스페어’라는 용어에서 보듯이, 해리는 왕실에서 왕위 승계 후순위 왕자, 즉 계승자의 유고시를 대비한 예비용 왕자로 태어나 크고 작은 차별을 겪으며 성장했다. 어머니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의 사망 소식으로 어린 해리의 삶은 요동치고, 이때의 상실감은 이후 왕실과 언론을 향한 적대감으로 발전한다. 별로 뛰어나지 못한 공부 머리와 튀고 싶은 성격 탓에 학교와 파티장 등에서 온갖 추문을 만들고, 그때마다 언론은 해리를 ‘멍청이,’ ‘사고뭉치,’ ‘예비용’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던 해리의 방황은 영국 육군에 입대하며 전환기를 맞는다. 전방항공통제관과 아파치 조종사 등 쉽지 않은 훈련을 적극적이고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실제 전투 현장에 투입되며, 타블로이드 언론의 비판 기사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영웅의 이미지를 쌓아 간다.
그러던 해리에게 ‘내 삶의 주인’이 등장한다. 메건 마클.
이번에는 기존의 타블로이드 신문과 파파라치뿐 아니라 저명한 보수 인사들까지 이들을 향한 잔인하고 인종 차별적인 공격에 가세한다. 메건 마클의 출신과 피부색을 문제 삼으며 영국 왕실의 혈통(blue blood)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왕실 내부의 암투와 가족간 불화에 지친 해리는 영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캐나다를 거쳐 미국을 전전하는 사이에 왕실에서의 권한과 직무의 대부분을 박탈당했고,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파파라치들의 위협 속에서 지금도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스페어’는 해리 왕자의 유년 시절을 다룬 1부와 영국 육군에서의 활약과 다양한 자선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2부, 인생의 동반자 메건 마클과의 만남에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올리고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기까지의 3부로 구성된다. 자서전인 만큼 철저히 해리 왕자의 1인칭 관점에서 진술하며, 번역 또한 해리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최대한 원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했다. 문맥에 따라 읽기 편하게 우리식 표현을 사용했지만, 번역가로서 너무 월권하지 않도록 균형도 필요했다.
‘해리 왕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닌가?’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설마 가족끼리 그럴 리가.’
‘그게 사실이면 저 신문사들을 다 없애야지. 저게 무슨 언론이야.’
‘선진국인 영국에서 설마 저런 일이 있을라고...’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실제로 해리 왕자가 자신의 기억이 분명치 않다고 기술한 대목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이 책에는 해리 왕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사실 자료들도 수록되어 있다. 해리의 주장이 아니라, 그동안 공표된 사실 정보만으로 판단하더라도 현재 영국 왕실의 내면과 영국 언론의 행태가 우리의 생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왕실 인사의 가십거리로서보다는, 엄혹한 왕실에서 후순위로 태어난 한 인간이 헤쳐나가야 했던 인생 역정에 방점을 두고 읽다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