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마치고...
공교롭게도 정치 성향의 근원에 대해 다룬 이 책의 번역을 끝낸 지 불과 며칠만인 2024년 12월 3일,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무려, 비상계엄이란다. 경제가 어렵긴 해도 국민 모두가 멀쩡하게 생활하던 민주사회에서 준전시에나 있을 법한 계엄이 떨어졌다. 일부 정치 세력이 미심쩍은 이유로 정치적 반대파를 향해, 사실상 대다수 국민을 표적 삼아 군대까지 끌어들여 준동했다. 이번 사건은 이 책의 주제인 진보와 보수, 즉 정치 이념의 근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념이 아니라 상식과 몰상식의 문제요, 민주주의와 독재의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왜 이런 사고를 하게 되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는 왜 존재하며, 왜 말조차 통하지 않을까? 성장환경이나 사회적 상황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동일한 대중 사회에서 비슷한 것들을 보고 들으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좌우의 대화는 금기처럼 여긴다. 이 쟁점에 관한 한, 상식도 윤리도 체면도 통하지 않는다. 서로가 마치 평생을 그 분야에 몰두한 권위자와 같은 자신감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이 논쟁의 공격 대상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예외일 수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왜 그렇게 대립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이 책을 번역하며 그 의문이 상당수 해결되었다.
타고난 성향이 달라서 그렇다는 주장에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그 차이를 바꾸기는 어렵다는 주장에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오랫동안 절친했던 벗과도 앞으로는 포기할 건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충분히 공감하고 대화하다 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접어야 한다는 뜻이다. 달라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달라지기 어렵다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식구가, 내 친구가, 너무 어리석고 편협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위안도 생긴다.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생물정치학 전문가인 존 R. 히빙과 케빈 B. 스미스, 존 R. 알포드는 정치적 견해가 문화적 배경이나 정보 편향보다 심리학적, 생물학적, 유전학적으로 다양한 특질(traits)의 결과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정치 지향(political orientation)의 근원에 대해서는, 개인이 일생 동안 경험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즉, 환경의 영향이 크다는 말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많은 언론 기사에 노출되고, 다양한 책을 읽고, 라디오 비평을 듣고, 중요 사건을 목격하고, 미묘한 정치색의 영화를 보고, 새로운 정보를 얻고,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환경의 영향을 강조하는 주장에서는, 새로운 환경 요인에 노출되면 정치 지향도 바뀔 수 있다는 결론을 지지한다. 따라서 누군가의 정치적 관점을 바꾸고 싶다면, 그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면(지금과 다른 환경에 처하도록 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세우는 주장은 완전히 다르다.
예컨대 트럼프는 네 번이나 기소되었고 (그중 한 번은 ‘미국을 편취하려는 모의’라는 혐의를 받았다. 지금의 한국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오랫동안 숱한 비행을 일삼았는데도 지지자들은 그에게 더 집착하게 되었다(우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로 계엄 세력의 지지층이 결집한다는 여론조사 사례도 있다). 트럼프의 정책과 인간형(persona)에 대한 지지는 그의 지지 기반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놀랍도록 깊이 형성되어 있다. 이 지지 기반에 속하는 사람들의 정책 선호도는 환경적 증거가 등장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트럼프의 반이민주의적이고, 친국방적이며, 비전통적 생활양식을 배척하는 태도를 지지하는 타고난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들의 성향과 연관된 환경적 증거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별개의 사안이며 완전히 다른 인과관계의 이야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트럼프에게 강경하게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타고난 성향의 영향으로 형성된 존재들이다. 트럼프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혐오하는 이유도 좌파 권위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책 욕구도 트럼프와는 완전히 상충한다.
저자들은 좌파와 우파의 특징을 미국의 근본적 사회 딜레마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이 내용은 최근의 한국 사회에 비추어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외에도 보수주의자들은 대체로 안정적이고 점진적인 성장과 질서, 규율, 통일성 등을 선호하는 데 비해, 진보주의자들은 신속한 개혁과 변화, 다양성 속의 질서, 개방성 등을 추구하거나 여기에 거부감이 덜한 경향이 있다.
다섯 가지 근본적 사회 딜레마에 대한 입장 분류 및 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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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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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집단(이민자 집단)에 대한 혐오 외집단에 대한 개방성
규범 위반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 규범 위반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
전통적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포용 새로운 생활양식을 적극적으로 포용
강력한 리더를 향한 기대 강력한 리더를 향한 의심
재분배에 대한 반감(외부자들이 수혜를 받을 때) 평등한 재분배에 대한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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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저자들은 개인의 정치 지향에 미치는, 근본적으로 타고난 성향(predisposition)의 영향력을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사회심리학적 근거뿐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론적 증거까지 제시한다. 결국 정치도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며, 다만 유전에도 변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같은 가족 내에서도 DNA 변이로 인해 정치 지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족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가 설명되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근거들 중에서도 특히 유전성 상관계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질별 유전성 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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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질 평균 유전성 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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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 1.00
눈 색깔 .92
키 .80
정신분열증 .77
지능 .63
비만 .63
ADHD .57
폭력 행동 .49
음악적 재능 .48
운동 능력 .47
성격 .45
알코올 중독 .42
정치 지향 .32
유방암 .31
성적 지향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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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oughby 외, “자유 의지, 결정론, 행동의 유전성”에서.
표에서 보듯이 혈액형과 눈 색깔, 키와 같은 특질은 유전적 영향이 매우 큰 반면에, 정치 지향과 유방암, 성적 지향 등은 상대적으로 낮으며 비유전적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유전의 영향력이 상당하지만 유전적으로 완전히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전성 상관계수가 ‘0’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유전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다는 뜻이며, 저자들은 여러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정치 지향의 유전성이 .32보다는 더 높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책의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개인은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이 유전적 꾸러미는 태아기와 출생 직후에 바뀌고, 이후의 발달 과정에서 온갖 환경적 영향으로 다시 수정된다. 이처럼 다양한 영향의 원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다양한 상황에 행동과 태도로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성향적 경향성’이 형성된다. 이 성향에도 관성이 있어서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성향이 개인의 태도와 행동을 체계화함에도 완전히 결정하는 건 아니다. 정치는 이 타고난 성향의 위력과 무관해야 할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연구 사례는 수없이 많다. 타고난 성향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다양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다양성에서 유발되는 갈등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더러는 유혈 사태를 유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정치적 관점이 고상한 이성이 아니라 원초적인 생물학에서 비롯되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나아가 타고난 성향은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처리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당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뿐 아니라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소중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제 나도 앞으로 그 절친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방향이 잡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부록에는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스무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저작권 문제가 있어 첫 파트의 다섯 가지만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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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우파 20문항 게임
타고난 성향에 관한 다섯 가지 질문
1. 코미디 촌극의 한 부분으로, (허락을 받고) 아버지의 뺨을 때릴 수 있습니까?
a) 예 b) 아니요
2. 아침에 아파트나 집을 어질러 놓고 출근할 때가 있습니까?
a) 예 b) 아니요
3. 자녀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a) 친절 b) 존중
4. 추상적인 아이디어와 이론적인 토론을 따분하게 느낍니까?
a) 예 b) 아니오
5. 15초 동안 신중하게 생각하십시오. “청결함은 신성함에 버금간다.” 지금 여러분의 생각에 더 가까운 답은 무엇입니까?
a) 네... 그럴 듯하네요 b) 무슨 소리죠???
(그래도 용서가 안 되는 인간도 있더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