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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 Ing Jan 15. 2024

240115 일단 즐겨보기

레주메를 뒤집어엎는 것도, 영어로 한 시간 커피챗을 하는 것도

지금은 밤 11시, 바깥 기온은 -18도이다. 요 며칠 동안 최저 -24도를 찍는 급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해발고도가 1600m나 되는 고산지대라 그런지 날씨가 범상치는 않다. 이렇게 화요일까지 춥다가 갑자기 최고 10도까지 올라가는 아주 신기한 곳이다. 어제는 밤새 눈이 와 이곳은 마치 겨울 나라 같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얘기도 하고 싶지만 지난 일기를 쓴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많은 일이 있어 이 지역 얘기는 또 다음으로 미룬다. 기쁘게도 말이다. 


목요일엔 사실 지지난 일기에 자랑했던 그 다시 작성한 이력서를 뒤집어엎었다. 우연히 존경하던 분께 레주메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내 자만과 달리,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잘 안 보이고, 어떤 스킬을 지니고 있는지도 잘 안 보인다는 피드백이었다. 그래 이력서를 새로 써보자 싶어 다른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의 이력서를 링크드인에서 찾아보았다. 나는 저번 이력서를 쓸 때 피그마 템플릿을 참고해 만들었는데 내가 당시 추구한 '깔끔해 보이는 이력서'와 달리 다른 개발자들의 이력서는 이게 읽히나 싶을 정도로 꽉꽉 차 있었다. 워드의 페이지 좌우, 상하 여백을 거의 0으로 만든 포맷들에 가까웠다. 


한기용 님의 이력서 작성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니 "스크리닝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먼저다. 일단 다 넣어라"라는 말을 하시더라. 내가 그동안 서류에서 많이 떨어졌던 것이 이 것 때문일까 싶어 이번 이력서는 스킬 영역을 추가하고 빵빵하게 채워 넣었다. 마치 상품의 검색태그 마냥 말이다.


새 이력서 작성 맞이 결제한 GPT4의 도움으로 새 이력서 작성을 비교적 빨리 할 수 있었고, 나는 새 이력서를 들고 또 매일 하는 잡 어플라이를 했다. - GPT4는 이전 회사에서 결제 지원해 줄 땐 안 쓰고 이제야 내 돈 주고 쓰는데 묘하게 가벼운 것도 오래 걸려 과하게 똑똑한 친구라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번 이력서로 넣은 첫 회사는 I였는데 바로 온라인 시험 보라는 메일을 받았다. 이거 새 이력서가 먹히는 건가? I를 시작으로 12일에는 괜찮은 스타트업 두 곳으로부터 인터뷰 진행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비록 그 두 곳 모두 지난 버전 이력서를 제출한 곳들이긴 하지만 짧은 이틀 사이에 내 이력에 관심을 가지는 회사가 많아져 정말 기뻤다. 또 미국에서의 취업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분을 통해 한 회사에 레퍼럴을 받게 되었는데 hiring manager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는 경험이 너무도 짜릿했다. 내가 하나도 안 되면 어떻게 하지 걱정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기대치 않았던 수확들이다. 아직 최종으로 된 거 하나 없음에도 마치 연락 온 회사들을 두고 하나 골라야만 할 것 같은 고민도 해 본다. 지금 이 행복을 즐겨주겠다.


좋은 소식 말고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12일 금요일에는 첫 영어로 하는 on-site 커피챗도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지원했다가 인터뷰 프로세스를 진행하자는 답변을 받은 곳이었는데, 회사에서는 당장 필요한 포지션이라 당시에는 더 진행하지 못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새해 인사와 함께 "나 드디어 미국에 왔어! 혹시 아직 사람 뽑니?" 물어봤는데 마침 그 포지션을 한 명 더 채용한다고, 관심 있으면 커피챗 하자는 답변을 받았다. 영어로 한 시간이나 해야 하는 커피챗에 자칭 커피챗 달인인 나도 많은 걱정이 들었고, 지난 회사의 복지인 링글 영어 수업을 알차게 이용해 미국 친구들에게 커피챗 준비 팁을 받기도 했다. 


12일 커피챗 시간이 다가오고 커피챗 준비를 하면서 자기소개를 영어로 써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중얼거려보기도 했지만 점점 커지는 긴장에 배가 아파왔다. 이 놈의 미국 집은 바닥난방이 없어서 히터를 틀어도 손 발이 차가워졌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크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네가 그동안 한 커피챗이 몇 개인데! 어? 너 지난번 이직할 때 온사이트, 전화, 줌 미팅까지 섞어가면서 하루에 세 번, 네 번도 했었잖아! 네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이 리크루터, 개발자, 대표까지 얼마나 다양하고 많은데! 네가 커피챗에서 날아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 순화된 버전으로 적어보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유튜브에서 이소라 님의 EO 영상을 보기도 했다. 가서 나대고 오리라. 영어가 뭐 대수냐! 난 전투력을 풀 차지하고 오피스로 향했다. 집에서 멀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동네 대중교통이 좋지 않아 한 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를 타야 하다 보니 약속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하게 되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허둥지둥하다 보니 별 긴장할 새도 없이 커피챗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는 인사를 나누고 공유오피스의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 회사는 본사가 다른 곳에 있고, 이 지역에 프로덕트 팀을 꾸리고 있는 스타트업이었는데, 오늘의 커피챗 상대는 프로덕트 엔지니어링 리드를 하고 있는 L이었다. L은 내가 앉자마자 내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했다. ...갑자기? 내가 경험했던 커피챗들은 보통 먼저 말을 꺼내고 내게 질문했기 때문에 이 순서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봤다. 내 질문에 어느 정도 답해준 후 L이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질문들은 나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주제라 내 답변이 길어질 때도 있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계속 말하면서도, 말이 느려질 때도 있었고, 스스로 시제나 단/복수를 틀리는 것을 자각할 때도 있었고, 이 단어가 맞나 싶은 때도 많이 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L은 내 눈을 보고 You're right, Understand 등 리액션을 해주며 내 말을 경청해 줬고, 덕분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풀 수 있었다. 한 시간을 꽉 채우는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질문으로 나는 L에게 질문했다. "나는 한국에서는 커피챗을 많이 해봤지만 영어로 하는 커피챗은 이게 처음이다. 이 커피챗이 어땠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인상이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L은 내가 하는 얘기가 전부 이해가능했다고 하면서도 이 커피챗을 통해 나의 어떤 부분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어떤 부분은 아직 모호한지 얘기해 줬다.


급하게 다시 한 시간에 한 번 있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며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정말 내가 해 낼 줄은 몰랐다. 나 진짜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들었다. 일과 관련된 첫 번째 영어 사용 경험을 잘 마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미국에 오며 가장 큰 걱정이 언어로 인한 장벽이었는데, 생각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 많은 향상이 필요하겠지만, 서로 진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충분히 전문적이었다. 


나에 대한 뿌듯함과 함께 커피챗을 젠틀하게 이끌어준 L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아, 나도 누군가와 대화할 때 저렇게 리액션하고 기다려줘야지. 그리고 담담하게 피드백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떤 회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시간이자, 같이 일할 매니저인 L에 대해 기대감이 생기는 시간이었다. 인터뷰 프로세스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토요일에는 지난번 발레 수업에 갔다 우연히 알게 된 한국어 부전공을 한 친구와 처음으로 만나 커피를 마셨다. 그 미국인 친구와 한국어와 영어의 어려움에 대해 얘기하고 다음번엔 점심을 먹자고 약속했다. 그 친구는 자신의 한국인 튜터를 소개해줬다. 그 한국인 튜터와도 문자를 주고받으며 다다음 주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오늘은 지난 회사 동료를 통해 이 지역 대학교로 교환학생 온 CS 전공 학생을 소개받았다. 이제 나도 조금 먼저 온 사람이 되었다.


또 미국에서 창업한 한국인 창업자 분들과 커피챗도 할 수 있었다. 타국에서 취업을 하는 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미국에서의 창업이라,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리고 그 도전을 하는 분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하며 공감대를 발견한다. 나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커피챗을 좋아한다.)


다음 주는 감사히 일정이 많다. 첫 주 보다 둘째 주, 그 보다 셋째 주 점점 일정이 늘어간다. 친구도 하나 둘 늘어간다. 웃기게도 여유가 생기니 다시금 생각나는 건데, 이 백수 기간은 회사 다닐 때 하지 못 했던 것들을 다 해볼 수 있는 참 좋은 시기이다. 내가 언제 미국에서 창업한 한국인과 이야기해 보고, 현지 개발 리드와 만나 왜 스타트업에 조인했는지 물어보고, 공개적으로 링크드인 글도 당당히 쓸 수 있겠는가. 일단 즐겨야지. 즐길 수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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