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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Jul 10. 2022

어장관리

Karu's Novel B-2

  연애에서 밀당은 꼭 필요하다고 했던가? 굳이 연애가 아니어도 필요한 상황은 많은 것 같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상대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 수 있다. 한 명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많을수록 좋다. 너희에게 마음을 쓰는 척 하지만, 사실 직접적인 감정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가둬 놓은 아이들 중에서 가장 좋은 애와 사귀려는 거니까. 나만의 어항, 나만의 동물원이다. 너희는 그저 나에게 놀아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게.. 사실 나도 예전에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너무 크게 상처를 받아버렸어. 그 뒤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무섭더라. 그래서 딱히 연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렇구나..."

  "응, 혹시 더 궁금한 건 없니, 은아야?"


  요즘에는 주로 은아의 고민상담을 해주고 있다. 말이 고민상담이지, 사실상 연애 상담이다. 이전보다 은아의 경계심이 확연히 줄었다. 이제 눈에 보인다. 잘하고 있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내 장난감이 되어주라.


  "들어줘서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친구는 무슨... 넌 그냥 나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


  순진한 걸까, 둔한 걸까. 여자애들의 패턴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것만 잡아내면 꼬시기는 쉽다. 분명 주변 남자애들은 날 쓰레기로 보고 있겠지. 무슨 상관인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정우랑 민서는 서로 좋아하고는 있지만 둘 다 알아차리지 못한다. 멍청한 새끼들. 둔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불쌍할 뿐이다. 그렇게 살아라. 그게 너희의 운명이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비참하게 끝나거라. 꼬시는 것도 능력이다.


  중요한 건, 내가 거느리는 여자애들은 서로 모르는 애들로 해야 한다. 혹시나 정보가 서로 퍼지게 되면, 분명 바람직한 상황은 오지 않을 테니까. 이 정도의 계산은 당연히 미리 해두었다. 이것도 못하면서 누굴 장난감으로 만들겠어? 좋은 머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여보세요."

  "응, 서아야."


  새벽 전화를 하면 재밌는 점들이 있다. 반전 매력이라고 해야 할지. 낮에 전화할 때와는 목소리가 확연히 다르다. 술을 마셨거나, 졸리면 목소리 톤이 올라가는 애들이 있다. 술 마셨는데 졸린 경우엔 말할 것도 없다. 혀까지 저는 경우가 많으니까. 귀여울 뿐이다. 물론,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고 그냥 귀여운 강아지 취급이다. 어장관리를 할 때엔 절대로 내가 이끌리면 안 된다. 먼저 호감을 갖는 것도 안 된다.


  "너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

  "헤헤헤... 있잖아... 우울해서 쪼끔만.. 마셨어..."


  이런 식이다. 특유의 혀 짧은 소리. 심심할 때 들으면 뭐 봐줄 만하다. 사실 서아는 올해 처음 만났다. 학교에선 도도한 인상이긴 한데, 일부러 학기 초에 좀 밀어붙였다. 그리고 내가 서서히 내빼면, 따라온다. 다행히 서아에겐 이게 먹혔다. 우리 강아지. 언젠가는 나 없으면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줄게.


  두 시간에 걸친 전화가 끝났다. 고민상담, 별 거 없다. 그냥 대충 들어주고 맞장구 몇 번만 쳐 주면 끝이다. 무식하게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거나, 진심 어린 공감을 전해주려 할 필요도 없다. 그러고 있는 내 시간이 아깝다. 누가 장난감에게 그 정도 노력을 쏟고 싶겠는가.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불쌍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른다.


  그로부터 이주일 뒤, 의도하진 않았지만 서아와 함께 있는 시간이 꽤 늘었다. 은아와는 그저 나에게 신경을 계속 쓸 정도로만 관심을 주고 있다. 식어갈 때쯤 연락하고, 들이대진 않지만 나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도록. 적당히 버티면 넌 분명 초조해할 테니까.


  점심시간에 서아가 나를 옥상으로 불렀다.


  "... 와줬구나."

  "왜 불렀어?"

  "잠깐 앉아봐."


  "하늘 예쁘다."

  서아를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


  "우리 처음 본 지 얼마나 됐지?"

  "이제 한 5개월쯤 되지 않았을까."

  "그렇지..."

  "..."


  "언제부턴가 계속 네가 눈에 띄더라고. 그리고 항상 힘들 때 고민 들어주는 것도 고마웠어."

  "아냐, 말해줘서 나야말로 고맙지."

  "난 그냥 널 친구로만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더라."

  "..."

  "나 너 좋아하는 것 같아. 넌 날 어떻게 생각해?"


  왔다.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내 모든 건 꾸며낸 환상일 뿐, 진심이 아니다. 네가 보는 지후는 진짜 내가 아니다.


  "글쎄..."

  "..."

  "아직은 잘 모르겠어. 우리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기도 하고..

   일단은 시간을 좀 갖고 서로를 알아가자."

  "그래..."


  서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일그러진 건 아니다.

  완전히 널 차 버리면 나에게 오지 않겠지. 여지를 남겨주는 게 가장 좋다.

  그래야 네가 헛된 희망이라도 품을 테니까.




  "아니 진짜 그랬다니까? 그런데 걔는 날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몰라, 그런데 그 자리에선 그렇게 싫은 내색 안 하던데."

  "그야 너 바로 앞이니까 안 했겠지."

  "아니 들어봐! 카페 가서 서로 수다 떨고 학교 얘기하고 그랬는데, 서로 눈 맞을 때 슬쩍 웃어주고 그랬다니까. 분명 호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신 차려. 그거 어장이야."

  "뭐? 주하린,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네가 봤어? 어떻게 그걸 확신해?"

  "하..... 지윤아."

  "왜?"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거, 그게 어장이라고. 그 사람한텐 그냥 네가 계륵 같은 거야.

   가지긴 싫은데 남 주긴 아까운, 그런 아이라고. 그러니까 애매하게 밀어내는 거고."

  "어...?"

  "생각해봐. 완전히 쳐내면 네가 마음을 접고 그 남자 곁을 떠나겠지? 그럼 어장이 풀리는 거잖아. 어떻게든 붙잡고 싶으니까, 너한테 여지를 남겨 주는 거라고. 너처럼 순수한 애들 마음을 이용해서."


  주하린, 거슬린다. 어떻게든 한지윤이랑 떼어놓아야 내가 다가갈 수 있을 텐데, 벌써부터 저렇게 정신적으로 주입을 해버리면 내 입지가 곤란해진다. 나머지 둘처럼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야 김지후, 너 뭐하냐? 멍때리냐?"

  "뭐야 이 새끼는"

  "야 됐고, 그래서 누군데, 은아냐 서아냐?"

  "둘 다 아니라니까?

  ... 근데 한지윤 쟤는 누구 얘기하고 있는 거냐?"

  "와 이젠 지윤이까지 껴드냐? 이 새끼 아주 그냥 여자에 눈이 돌아간 새끼네..."

  "닥쳐."


  "쟤네 이쪽 보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아?"

  "쟤네가 누군.... 아..."

  "박승우도 알아?"

  "뭐를?"

  "네가 쟤 좋아하는 거"

  "미친년아 닥쳐... 그걸 그렇게 크게 말하면.."


  승우랑 지후랑 무슨 얘기를 하는진 몰라도, 둘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다. 아마... 못 들었겠지. 차라리 다행이다. 제발.


  "푸핫. 쫄기는. 그런 유리멘탈로 고백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언젠간 하겠지..."

  "너 그러다 뺏기는 수가 있다?"

  "... 어?"

  "아 너 몰랐냐? 쟤 저번 주에도 고백받았다가 찼다는데."

  "......."




  재밌는 광경을 본 것 같다. 승우는 인기가 많다. 주하린이 어장이니 뭐니 그랬으면서도, 승우는 그냥 순수할 뿐이다. 아무것도 몰라서, 본인의 행동 자체가 어장 치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뿐이다. 아니, 사실 어장이라고 볼 것도 없다. 그냥 지들만의 착각이겠지. 썩어 빠진 나에 비하면 승우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순수하게 인기가 많은 것뿐이다. 지난주에도 고백받았다가 차였으니. 차라리 잘 됐다. 지윤이가 그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반쯤 포기하지 않았을지. 조용히, 조용히 내 안으로 들어와라.


  더 이상의 추태를 부리는 건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다. 잠시 승우에게 가 있어라. 지윤, 지금은 굳이 잡지 않겠다. 언젠가 네가 다시 내 눈에 트인다면, 그때 끌어들여도 늦지 않아. 둘이 사귄다고 해도 상관없다.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헤어진 사람과는 분명 친구로 지낼 수 없다. 그때 내 편으로 끌고 와도 충분하다. 그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둘을 갈라놔야지.


  새벽 공기는 역시나 쌀쌀하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본다.


  "여보세요." 

  "어... 지후야?"

  "어, 나야."


  한동안 은아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슬슬 그물을 뚫고 빠져나가려고 하기에, 조금 더 세게 조였다. 네가 있을 곳은 여기 안이야. 절대로 밖으로 못 나가. 너도 결국엔 나에게 이용당하는 것뿐이니까.


  "연애는 무서워. 그런데... 그런 설렘은 느껴보고 싶다."

  "그러게."




  "승우야, 같이 가자!"


  지윤이가 해맑게 손을 흔들며 웃는다. 어딘가 모자라보이긴 한다. 그래도 그게 저 아이의 매력이 아닐까. 키워봐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중간에 질리면 빨리 버리는 거고.


  "알았어, 간다. 가."

  "박승우, 실실 쪼개는 거 보니까 아주 좋아 죽겠나봐?"

  "뭐래는 거야 이 새끼는..."


  벌레 씹은 느낌이다. 둘이 깨지길 바랐는데. 뭐, 지켜보는 것도 재미는 있겠다.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들은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솔로들과 많이 다르다. 한지윤, 너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 건가.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꼭, 승우와 무참히 깨지고 나에게 찾아와 주길. 누구보다 따뜻하게 대해주고, 장난감처럼 다뤄줄 자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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