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u's Novel B-1
<Phase A>
1년이란 시간은 길지도, 짧을지도 모르겠다. 겨울방학을 앞뒀다. 그동안 우리 3학년 7반에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반 친구들 모두가 욕하던 수행평가는 물론이고, 반 단체로 간 졸업여행까지. 이제 좀 있으면 이 학교를 떠난다. 이제 지긋지긋한 이 학교 생활도 안녕이다. 그래도, 이제 더 이상 너를 못 보게 되겠지.
'이왕 끝나는 거, 내 마음을 전하고 가는 게 맞는 걸까...
친구로도 지내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선을 넘는 데엔 용기가 필요하다. 그 마음을 갖고 선을 '잘' 넘는다면 더 행복해질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결국 나 자신만 초라해질 뿐이다. 이제 너를 볼 일이 없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맞을까.
"민서야, 담임 선생님께서 부르셔."
"아.. 바로 갈게."
민서는 착하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다. 내 어휘력으로는 구사할 수 없을 만큼 멋진 친구다. 슬쩍 너를 바라본다.
"야 박정우! 너 또 걔 다보냐?"
"닥쳐."
아는 애들도 있는 것 같긴 하다. 굳이 인정하고 싶진 않다. 밝히고 싶지도 않다. 네가 뭔데? 너네가 나랑 걔를 이어 주기라도 할 거야? 아니잖아. 이상하게 꼽사리 껴서 우리 사이 갈라놓지 말아 줘라. 부탁이다.
<SWITCH - Phase B>
3학년이 끝나간다. 1년이 아쉽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은이와는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거. 그런데 아마 정우와는 떨어질 것 같다. 뭐... 어쩔 수 없겠지. 이제 너와는 만나기 힘들 거다. 그 사실이 나를 너무 마음 아프게 한다.
"민서야, 담임 선생님께서 부르셔."
"아.. 바로 갈게."
멍때리고 있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왜 정우는 항상 내가 방심하고 있을 때만 말을 거는 걸까. 정우 얼굴을 쳐다보기가 부끄럽다. 목소리를 또 듣고 싶다. 교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는데, 뒤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야 박정우! 너 또 걔 쳐다보냐?"
"닥쳐."
걔가 나라는 걸 안다. 한서가 항상 정우에게 시비를 털던데, 왜 그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괜히 정우가 나에 대해 나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마음이 왜곡된다는 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그 마음이 언제 물들지 모르니까.
<SWITCH - Phase A>
민서가 나갔다. 괜히 한서 녀석 때문에 진땀을 뺐다. 못 들었겠지? 부탁이다. 제발 내가 먼저 이야기하기 전까진 넌 몰랐으면 좋겠다.
'좋아한다고.'
이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이 말 한마디로 우리는 연인이 될 수도 있고, 다시는 보지 못할 사이가 될 수도 있다. 너라면 어떨까. 너는 과연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할까. 혹시라도 네가 날 싫어하면 어쩌지. 불안해서 미칠 것 같다. 그러니, 그러니 더더욱 숨기고 싶은 것이다. 네가 날 싫어하지 않길 바라며.
"밥 먹으러 가자!"
종이 쳤다. 잠깐 민서를 불렀다.
"민서야, 나랑 밥 같이 먹지 않을래?"
<SWITCH - Phase B>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교무실에 갔다. 선생님께서는 웃으면서 날 반겨주셨다.
"어, 민서 왔구나! 다름 아니라, 이거 싸인 좀 부탁하려고."
"네."
사실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정우 목소리만 들으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다. 내가 저 정도로 정우를 의식했었나? 모르겠다. 일단 좀 진정을 해야겠다.
종이 쳤다. 여자애들을 따라 나도 급식실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날 불렀다.
"민서야, 나랑 밥 같이 먹지 않을래?"
정우였다. 몇 번 밥을 같이 먹은 적은 있지만, 그땐 분명히 다른 친구들도 함께 있었다. 그 사이 반 애들은 먼저 다 내려갔다.
"그래. 그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기가 피어났다. 실없이 웃는 모습 들키기 싫은데, 못 본 척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역시 또 둘만이다. 유독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SWITCH - Phase A>
"6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어째서인지 아무도 없다. 아까 시간을 너무 끌었나 보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과. 의식을 하니 괜히 땀이 난다. 덥다. 곁눈질로 슬쩍 민서를 쳐다봤는데, 무덤덤한 표정이다. 괜히 나 혼자 의식하는 것 같아 좀 뻘쭘해졌다.
"어..."
내려오기 전에 시간을 끌었더니, 급식실 앞 줄은 이미 2학년과 1학년이 빼곡히 늘어서있었다. 내 탓이다. 괜히 민서를 불러내 가지고 이렇게 밀려나다니. 민폐 끼치기는 싫어 먼저 들어가려고 했다.
"정우야, 어디 가?"
"어차피 우리 3학년이니까.. 먼저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
".... 그럼"
"잠깐 따라와."
민서가 급하게 날 어디론가 데려갔다. 학교 정원이다. 얼마 전에 눈이 온 탓에 눈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날 여기에 왜 데리고 온 걸까. 무엇보다, 너 지금 추워 보인다. 감기 걸리겠다.
"여기 좀만 있다가 가자."
<SWITCH - Phase B>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줄이 길다. 아마 아래 학년들이 다 내려온 것 같다. 다행이다.
"정우야, 어디 가?"
갑자기 정우가 줄 서있는 아이들을 앞질러서 먼저 들어가려고 했다.
"어차피 우리 3학년이니까.. 먼저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
눈치가 없는 걸까.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 그럼"
"잠깐 따라와."
정우의 말을 끊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둘만 있고 싶었다. 어차피 마음 정리도 안 되고 뒤숭숭한 거, 그냥 확실하게 테스트해보고 싶었다. 너에겐 미안하다. 그래도, 내 마음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니까.
"여기 좀만 있다가 가자."
어느새 눈이 많이 쌓였다. 사실 뭐 눈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내 곁엔 네가 있다. 우리만의 공간에, 너와 나. 이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안 추워?"
정우가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줬다.... 따뜻하다. 뭔가 살짝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감기는 아닌데, 볼이 뜨겁다. 왜일까.
<SWITCH - Phase A>
로제 파스타가 나왔다. 약간 맵다. 난 매운 걸 잘 먹지 못한다. 민서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다. 밥을 먹으면서도 민서를 흘깃 쳐다봤다. 머리를 넘긴다. 포크로 면을 돌돌 만다. 숟가락에 얹어 한 입에 넣는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핀다. 이건 확실하다. 역시 민서는 귀엽다.
"야, 내가 쩌는 거 보여줄게. 봐봐!"
"지랄하네 저거 또."
"닥치고 봐. 후으읍.. 켁"
"아 미친 개더러워...."
안 봐도 뻔하다. 우리 반 남자애들이다. 하도 저러고 다니니, 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다. 괜히 내가 다 민망하다.
민서의 볼에 소스가 묻었다. 왠지 모르게 귀엽다.
<SWITCH - Phase B>
로제 파스타가 나왔다. 난 로제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토마토와 크림 모두를 좋아한다. 사실 배고플 때는 그냥 둘 다 먹긴 하는데, 평소에는 로제 파스타로 만족한다.
맛있다. 분명 약간 맵다. 정우도 매운 걸 잘 못 먹는 것 같던데. 먹으면서 손으로 부채질하는 모습을 보자니 왠지 동생 같기도 하다. 어떨 때는 굉장히 듬직한데, 이럴 때 보면 어린아이 같기도.
밥을 다 먹고 올라왔다. 양치하려고 거울을 봤는데 볼에 뭔가 묻어 있었다. 아까 밥 먹을 때 묻었었나 보다.
'미쳤나봐...'
정우도 분명 봤을 거다. 날 보고 뭐라고 생각했을까? 으아...
"... 하니, 내일 졸업식은 10시부터 시작입니다. 일찍 오지 마세요."
"차렷! 담임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감사합니다!"
종례가 끝났다. 이제 내일이면 졸업이다. 점점 더 마음이 심란해진다.
정우가 내 앞으로 왔다.
"나랑 와플 먹으러 갈래?"
<SWITCH - Phase A>
역시 학교 파스타는 맵다. 도대체 양파랑 후추랑 마늘이랑 고추는 누가 왜 발견한 걸까. 식탁에서 사라져야 한다. 해로운 것. 너희들 때문에 민서가 밥을 제대로 못 먹었잖아.
뭐 사실 나도 많이 먹지 못했다. 분명 민서도 먹는 양이 있는데, 한 두 번 먹고 다 버린 걸 보면 역시 파스타가 매웠던 탓이 컸나 보다. 그냥, 시간도 때울 겸 같이 와플이나 먹으러 가야지.
"나랑 와플 먹으러 갈래?"
"오~ 웬일이야? 네가 쏘는 거지?"
"응."
학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유명한 와플집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다녔다. 차라리 학교가 여기랑 가까워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여러 번 든다. 그리고, 너와 같이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끼익ㅡ
"어서오세요! 이쪽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없다. 종업원 분께선 안쪽의 아늑한 자리로 우릴 안내해주셨다. 만화카페 같은 분위기다. 곰돌이 쿠션도 있다. 바닥도 따뜻해서 자기 좋다.
<SWITCH - Phase B>
어렸을 때 친구랑 와본 적이 있다. 그때뿐이다. 그땐 이런 자리가 있는지도 몰랐다. 새로 공간을 만든 걸까. 안방 같이 아늑한 느낌, 은은한 조명, 잔잔한 음악. 모든 게 몽환적이다. 괜히 더 설레는 건 기분 탓일까. 분명 지금 내 볼이 빨개져 있을 거다. 넌 모르겠지. 조명이 이렇게 약하니까.
"주문하신 와플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크다. 아니, 원래 이렇게 컸나? 하얀 생크림에 곰돌이 모양 초콜릿까지. 여기 사장님께서 곰돌이를 좋아하시는 거려나. 앙증맞다. 조금 있으면 나에 의해 목이 끊어지겠지만, 먹기 전에 사진이라도 많이 찍어둬야겠다.
찰칵ㅡ
동시에 셔터 소리가 울렸다. 하나는 와플을, 다른 하나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SWITCH - Phase A>
찰칵ㅡ
'아차.'
와플을 찍는다는 게 민서까지 같이 찍어버렸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아닌...
찰칵ㅡ
셔터 소리가 다시 울렸다. 민서의 폰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걸로 쌤쌤이란 걸까.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와플을 먹었다. 아니, 말을 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설탕이 많이 들어갔을까. 오늘은 유난히 달다.
어느덧 노을이 져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갑다. 민서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이토록 눈부신 너를 잡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유난히 너의 눈이 반짝인다.
"이제 갈 시간이네."
"그러게."
무심하게 던진 한 마디지만 어딘가 속을 긁어놓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제 내일이면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겠지. 그 사실이 너무나 속이 상한다.
<SWITCH - Phase B>
길기만을 바랐던 오늘도 결국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분명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 조각마저도 결국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현재는 지금.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이 아픈 조각을 오래 끌고 가긴 싫다. 괜히 버틸수록 우리에게만 더 힘들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그래도 아직은 너를 보내기 싫다.
말하고 싶다. 너를 좋아한다고. 분명 넌 모르고 있을 거다. 나도 네가 날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한 번 맡겨 보고 싶다. 사랑이라는 도박에 뛰어들어 너를 잃게 되더라도. 꼭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를 잡지 못할 테니까. 너와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도, 난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너를 보내주는 게 맞을 것이다.
<Phase C>
더 이상은 무의미한 시간 끌기다. 그동안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잘 가, 내일 보자."
"응, 너도."
서로를 바라보며 들리지 않을 말을 전한다.
'너는 분명히 날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이 마음은 가슴속에 묻어두고 지낼래.'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