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u's Novel A-5
맹점.
망막의 시각 세포가 없는 곳.
맹점에 도달한 빛은 그 누구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맹점은 시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띠링'
자기 직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지현』
침을 삼켰다. 예전의 트라우마가 다시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제 와서 연락을 왜 하는 걸까. 사람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치를 떨었다. 꼴보기도 싫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싫어했는데,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
'내일 끝나고 학교 뒤편으로 와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분명히 예전의 나라면 안 좋은 감정부터 차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기어코 그 문자를 읽었는가.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직까지 연락처를 지우지 않고 SNS에서도 차단하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긴 싫어도, 내 행동이 그렇다.
남들이 보면 우리를 분명 연인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친구였을 뿐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전혀 친구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게 했고, '연인 같은 관계'를 이어 나갔던 사람이니까. 힘들 땐 서로 이야기하며 의지하기도 했고, 외로울 때는 가벼운 스킨십을 나누며 서로의 욕구를 충족해주기도 했다. 우리 스스로는 연인임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우리의 무의식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알았어.'
내키지 않는 티를 내며 대답했다. 사실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다. 아니, 많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까. 모든 게 네 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친구로 지내는 동안 너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와서.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날 매정하게 버렸다. 그리고 구차하게 매달렸다.
분명 너의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박힌 건 사실이다. 그런데 너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네가 없는 빈 자리가 공허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너만의 빈 자리가 어느새 내 안에 생겨버렸다. 그래서 더욱 역겹다.
"어..."
"안녕."
어색하다. 지금 이 상황은 분명 어색하다. 지현이에게 절교 선언을 당한 지 반 년만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이 변했다. 겉모습부터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완전히 탈색한 너의 머리, 은색 피어싱을 한 나의 귀. 중요한 건 이런 외적인 변화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은 어떻게 변했는지. 그게 더 중요한 일일 테니까.
"그럼.."
"..."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심장이 마구 뛰어댄다. 설레서가 아니다. 두근거려서가 아니다. 무섭다. 이 사람이 또 나에게 상처를 줄까봐 두렵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더 철벽을 쳐야 한다.
"일단 앉자."
이렇게 말하고 나 먼저 가버렸다. 왠지 지현이를 대놓고 마주하기 거북하다. 먼저 가서 벤치에 앉으니 지현이도 금방 따라왔다.
"왜 불렀어?"
"할 얘기 있어서."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
일부러 까칠하게 대했다. 이렇게 해도 나에게는 손해될 게 없다. 어차피 끊어진 사이였으니까. 다시 잘 회복되면 나쁠 건 없지만, 굳이 과거의 사람에게 내 노력을 주긴 싫었다.
"미안하다는 말 하려고 왔어."
"뭐가."
"괜히 나 때문에 너까지 그런 게 아닌가 해서."
"그러니까 뭐....."
말을 하려다 그만뒀다. 걔 손목에 있던 선명한 상처를 봐버렸다. 그런 나의 시선을 의식이라도 한 듯이 지현이는 말 없이 소매로 손목을 가렸다. 식은땀이 났다.
"...너 때문은 아니야."
긴팔이라 보이진 않겠지만, 지현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무엇 때문에 사과를 하겠다는지 알겠다. 그런데 그걸 왜 지금, 굳이 이렇게 불러내서 말하는가.
"그리고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닐텐데."
"나도 알아."
"그런데 왜..."
"...."
서운하거나 분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찌저찌 그를 잊으려고 했다. 처음이라. 마치 연애의 감정을 느끼고, 그 누구보다 친했던 사람에게 절교 선언을 통보 받은 건 처음이라 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왜 무기력하고 우울했는지도 몰랐다.
버림받았다. 그 책임은 당연히 걔가 짊어지길 원했다. 내 마음이 허전한 게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친한 친구가 사라져서? 아니면 그녀의 빈자리가 나에게는 너무나 컸던 것일까? 이성으로서? 영원한 건 없다지만, 정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날도 한참을 울었다. 네가 착각한 것이리라 애써 사실을 부정하면서. 너도 나를 좋아했다. 천천히 친해져서 이 학교에서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넌 결국 날 끌어올려주고, 절벽에서 밀어버렸다. 차라리 너를 몰랐으면. 친구가 아니라 그저 '같은 반 애'였다면 좋았을걸.
"문서준.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냐?"
"한지현이 불러냈었다."
"......뭐?"
나는 은서의 위치를 잘 모르겠다. 나와 더 친할까, 한지현과 더 친할까. 둘 모두의 친구라고 해서 객관적일 수 있을까? 나는 은서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도 될까? 지현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아도 될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나 혼자 머릿속이 복잡한 것보단 나을 것이다. 은서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랬었구나..."
"..."
"근데 그건 좀 의외네. 손절하려고 했었다는 건 나한테 얘기했었는데..."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왜인진 몰라도 기분이 나빴다.
"다시 와서 그럴 줄은 몰랐어. 지금 나도 뭐가 뭔지..."
"너가 왜 고민해? 이건 우리 일인데."
"그게..."
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랬거든. 손절하라고."
나와 친한 상대에게는 절대로 연애에 관한 것들을 물어봐선 안 된다. 나에게 좋은 얘기만 해줄 게 뻔하니까. 그래서 난 연애에 있어선 누구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네가 손절하라고 했다고?"
"어. 안그래도 나한테 물어봤었어."
"야. 너 미쳤냐?"
"..."
"그걸 왜 네가 결정해?"
"말 똑바로 해. 내가 결정한 건 아니야. 결정은 지현이가 한 거지."
"그래도 네가 말한 게 영향이 있었겠지."
"진짜? 너랑 손절할 마음이 아예 없었다면 내 말을 안 듣지 않았을까?"
"...."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 와선 누구를 탓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따라와봐."
상담이라고 해야 할까. 상담 치고는 목소리가 꽤 컸다. 15분 가량을 은서와 이야기했다.
"너는 그럼 네 행동이 잘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당시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어."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 불만을 표현할 수 있었을텐데? 그게 어째서 최선이야?"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차라리 그냥 내가 먼저 쳐내고 말지."
"그게 문제라는 거야."
은서의 얼굴을 보았다. 흐트러짐 없이, 눈을 살짝 찡그린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동요하고 있는 나와 달리 아주 차분한 분위기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결국 너에게는 너의 감정만 중요하다는 거구나."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해?'
나쁜 생각도 들었지만, 괜히 불편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자기 시간 할애해서 얘기해주고 있는 거니까. 조금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얘가 어디까지 나가는지.
"알아. 지금 내가 한 얘기만 들으면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미친놈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건 나도 인정해. 그래도 내가 평소에 걔한테 해왔던 것들이 있잖아. 내가 걔를 얼마나 잘 챙겨주고..."
"아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은서는 허점을 찌르는 듯이 내 말을 끊었다.
"다른 행동으로 네 잘못을 정당화시키지 마."
살벌하던 상담이 끝났다. 나는 한참을 울었다. 은서의 태도도 처음보다는 부드러워졌다. 보상심리였을까. 사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안다. 나도 잘못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았다. 난 아마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죽고 싶었으니까.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아세트아미노펜을 과다복용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몇 달 전엔 그것 때문에 쓰러져서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받기도 했다.
"내가 말한 게 너에게는 많이 불편했을 거야."
"어."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눈까지 충혈된 상태로 상냥하게 대답하는 건 무리였다.
"당연해. 불편하라고 말하는 거거든. 그래야 너도 너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상처를 들여다본다는 건 어쩌면 잔혹한 일일 수도 있겠네."
한참 리스트 컷을 했을 때, 칼에 베인 내 손목을 관찰하는 게 일상이었다. 자해를 하면서 벌어지고 곪아버린 상처도, 완전히 곪아버렸다. 보기 싫어서 붕대를 감고 다녔다. 그러는 사이에 내 살은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그제서야 병원 치료를 받았다. 한참 항생제 연고를 발랐고, 지금은 거의 회복됐다. 물론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나도, 지현이도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가치관이나 신념도 다를 것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은 일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내면의 상처를 숨기고 살았으니까. 더군다나 치료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미 우리는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어버렸고, 어쩌면 다시는 이전처럼 돌아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
"너라는 사람의 내면을 보는 게 편하진 않을 거야. 그래도, 그걸 자꾸 반복해야 네가 편해져."
"..."
따지고 보면 은서의 말이 틀린 게 없다. 내가 나를 조금 더 빨리 알아차렸으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강은서."
"왜?"
"..지현이한테도 이런 얘기 했어?"
은서가 콧방귀를 뀌었다.
"진작 했지. 너보다 더 심하게 울어가지고 달래주느라 한참 걸렸다."
피식했다.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퍼졌다.
"고마웠다. 나중에 보자."
"별 말씀을. 필요하면 또 불러."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 알았다. 잘못된 것들을 모두 바로잡자.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휴대전화를 켜고 익숙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할 얘기 있어. 내일 학교 끝나고 반에서 기다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