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u's Novel B-3
한때 나를 가장 설레게 했던 사람이,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희생은 사랑이 아니야'
'희생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내 마음도 뒤죽박죽이다.
너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의 난, 어떤 선택을 할까.
"승우야 안녕!"
"어, 지윤아. 왔구나."
지난번에 하린이와 상담을 잠깐 했지만, 그건 딱히 별 영향이 없었다. 이미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고백은 관계의 시작이다. 너와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어서. 너와 함께 하는 학교 생활은 어떨지 궁금했다. 분명 서로를 헷갈리게 했던 때도 많았지만, 그땐 확신이 들었다. 학교 옥상으로 승우를 불렀다.
"너도 내가 무슨 말할지 알고 온 거지?"
"... 아마도."
"그게 맞을 거야."
"..."
"너 좋아한다고."
승우가 피식 웃었다.
"귀여워라."
그대로 승우에게 안겼다. 품이 따뜻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길을 걸어갔다. 친구로서의 승우는 이제 없다. 연인으로서의 승우만 남았다. 그때는 몰랐다. 너와 난 이렇게나 다른 사람이라는 걸. 서로를 좋아하면서도 아프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점심시간. 음료수를 들고 승우네 반에 찾아갔다.
"마실래? 사 왔어."
"복숭아 녹차..... 너 내가 이거 좋아하는지 알고 산 거야?"
"어 진짜? 지난번에 마니또 할 때 네가 나한테 줬잖아? 그래서 사 봤는데...."
승우가 살짝 웃는다.
"고마워. 잘 마실게."
문제집을 푸는 데 몰두하다가도 내가 뭐라도 챙겨 들고 가면 눈이 금방 순해진다. 귀엽다.
"잠깐 이리 앉아봐."
".. 왜?"
"그냥, 좀만 있다가 가라고."
의자를 끌어다가 승우 옆에 앉았다.
"우~ 염장커플 꺼져라!"
"쟤넨 뭐야?"
"부러워서 그러겠지. 신경 쓰지 마."
"응...."
"화장했어?"
"늦잠 자서 눈 화장은 못 했고 피부 화장이랑 틴트만 조금..."
"조금이 아닌데?"
"몰라..."
"너 어차피 안 해도 이뻐."
왠지 모르게 볼이 뜨겁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뭐래. 아니거든."
"근데 왜 숙여. 고개 들어. 내 눈 봐봐."
"....이씨."
능글맞게 웃어대는 승우를 보면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연애를 많이 해본 걸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저런 걸까. 연애하면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인다더니, 왠지 벌써부터 그런 것 같다.
".. 그래서 아~주 좋으시겠어요?"
"응! 염장이니 뭐니 했던 게 누구였더라?"
"... 난 몰랐지."
"푸핫."
지난번에 하린이에게 고민상담을 좀 받았었다. 그때 승우가 나에게 어장 치는 게 아니냐고 했었는데... 글쎄,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승우를 놓을까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내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다.
"그래서, 좋냐?"
"응. 아주 좋은데? 넌 연애를 왜 안 해? 아니, 못 해?"
"이 새끼가 염장질을.."
"아.. 아악! 놔!"
까불다 머리카락을 잡혔다.
"으휴.. 너란 애는 진짜..."
"풉... 미안."
"그래서, 한지윤. 네가 보기엔 승우는 어떤데?"
"음... 글쎄. 사실 처음에는 뭔가 매력적이다? 멋있다? 정도밖에 생각이 안 들었거든."
"응."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미치겠다... 하..."
"뭐가?"
"아니 이게 잘생겨 보이는 건 마음속에서 제어가 된단 말이야. 콩깍지가 벗겨지면 어느 정도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고.."
"해결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 않나?"
"끊지 말고 들어 봐. 그런데.. 남친이 귀여워 보이면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고 그랬거든? 나 근데... 승우가 너무 귀여워. 미쳤나봐 진짜."
"... 가라. 다시는 나한테 오지 마라."
하린이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냈다.
"야야. 삐지지 말고. 조금 더... 어? 승우야!"
"으휴 저 기집애는..."
이랬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넌 변했다.
맞춰주고 싶었다.
누구보다 사랑했으니까.
내가 고백했다는 책임감에, 힘들지만 헤어지자고 하지 못했다.
너는 나를 힘들게 한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도,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그렇게 늦고서도, 넌 나와 있으면서 인스타 하기에 바빴다.
참았다. 그래도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어서.
희생이야말로 정말 너를 사랑하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나 싶었다.
누굴 탓하겠어.
내 착각이었는데.
어느샌가 내 희생이 없으면 네가 날 떠날 것 같았다.
애착 유형이란 개념이 있다. 불안형, 회피형, 안정형. 연애에 있어서 MBTI라고 해야 할지, 나름 우리 상황에 꽤 맞는 것 같다. 나는 안정형인데, 승우 너는 회피형이다. 나는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관계가 안정될수록 편안함을 느끼고, 너에게 더 호감이 간다. 그런데 넌 그렇지 않다. 넌 나랑 친해지는 걸 꺼린다. 나를 피한다. 연애를 하면서도 날 멀리 하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태에서 이별을 하면, 승우는 분명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며칠 새에 훌훌 털겠지. 그런데 난 어떡하라는 걸까. 분명히 무너져 내릴 텐데. 네가 싫다. 그래도 보낼 수 없다.
어느샌가 우리의 앞날은 어두워졌다. 이젠 되돌릴 수도 없는 걸까.
'승우야. 끝나고 잠깐 남아줘.'
카톡을 보냈다.
이제 그만 끝내기 위해서.
"왔어?"
"어."
"..."
"용건이 뭐야?"
"난 더 이상 이렇게 못 지내겠어."
"..."
"그렇잖아. 항상 연애하면서도 내가 희생하는 기분이었고."
"..."
"난 널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내가 더 힘들더라도 어떻게든 너를 더 위하고 싶었고. 그런데 넌..."
"누가 그렇게 해달래?"
"뭐?"
"누가 희생하라고 했냐고. 그냥 네 멋대로 희생하고 상처받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야 박승우. 그래도 그렇지 말을..."
"틀린 건 아니잖아. 그게 상처가 됐다면 애초에 네가 그러질 말았어야지."
손이 떨린다. 침착하자. 지금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 맞아.... 그런데 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도 눈에서 무언가가 흐르는 건 멈출 수 없었다.
"너는... 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나 했어?"
"... 뭐?"
"넌 항상 그런 식이었어! 네 잘못은 생각도 하지 않고, 뭔가 문제만 생기면 항상 다 내 잘못으로 돌렸지? 그런데 넌 왜! 아니... 애초에 날 좋아하긴 했어?"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분명히 발음을 절고 있을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괜히 감정에 호소하는 건 역효과만 날 뿐이다. 조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숨을 쉬었다.
"승우야.. 너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해줘?"
"..."
처음부터 넌 내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린 연애하고 있잖아.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사람이 서로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었나. 난 너를 항상 바라봤다. 그런데 넌 나를 계속 쳐냈다. 너를 사랑하면서도, 너와 연애하면서도 마치 너를 짝사랑하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이럴 거면 연애를 왜 하지. 넌 대체 내 고백을 왜 받아준 거지. 가끔씩 네가 나를 향해 지어주는 미소, 다정한 손길과 스킨십에 나도 착각했나 보다. 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거, 그게 어장이라고. 그 사람한텐 그냥 네가 계륵 같은 거야.
가지긴 싫은데 남 주긴 아까운, 그런 아이라고.'
주하린의 말이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하필 이럴 때. 괜히 더 서럽다. 내가 그동안 크게 착각하고 있던 것 같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뭐..?"
"그냥 나 같은 새끼는 쓰레기로 남겨. 그게 너한테도 편하지 않겠어?"
"야... 넌 그러면 끝이야?"
"나한테서 뭘 더 바라? 네 말대로라면 난 연인의 자격도 없는 애인데.
그럼 넌 나 같은 애랑 왜 사귀었어? 고백은 왜 한 거야?"
"..."
끝났다.
이제 너와는 완전히 끝이다.
"우린 서로 맞지 않을 뿐이야."
30분이 흘렀다. 서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다시 차분하게 대화했다.
"그런 것 같아."
"인연이 아닌 사람끼리 만나서 굳이 상처받고 헤어지는 이유가 뭘까?"
"겪어봐야 아는 거지."
"뭐를?"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들."
"그런 거라면 이미 충분히 겪고 있으니까 확인사살시키지 마."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자, 이제."
"어."
"마음 같아선 다 잊고 지내고 싶은데, 너와의 추억이 나빴던 건 아니니까. 좋았던 기억까지 굳이 나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든가. 난 완전히 다 잊고 싶어."
"매정하네."
"결국엔 너도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니까."
"난 네가 처음이었는데."
"무슨 상관이야. 이제 난 너에게 전남친일 뿐인데."
"큭... 첫 연애부터 노답이구만."
"받아들여라. 그게 니 운명이다."
살짝 머리가 멍하다. 그래서 이렇게 자유로운 말이 오갈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이라면...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학교에선 봐도 아는 척하지 말자."
"굳이 그래야겠어?"
"어."
"... 왜? 넌 나보다 이별도 많이 겪었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래도, 헤어진 사람과는 친구로 지낼 수가 없더라."
".... 그래."
나의 짝사랑은 어디서 끝난 거였을까.
고백을 했으면 이제 서로가 마음을 확인하고 사귀는 거니까, 짝사랑도 끝났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난 승우와 사귀면서도 계속해서 짝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네가 날 좋아하긴 했던가.
결국엔 너도 어장이었나.
밤공기가 괜히 더 차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본다.
원래 이별은 이렇게 아픈 걸까.
사랑은 둘이서 하는데, 이별은 혼자서 한다.
넌 이미 정리가 되었겠지.
나는 앞으로 며칠을 더 아파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