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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루 Oct 11. 2022

남이 나를 믿어주지 못한다면

Karu's Story #23

환영합니다, Rolling Ress의 카루입니다.


  수능 D-50이 찾아왔습니다. 덕분에 고3들은 이제 수험생이란 지위를 제대로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능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도 대입은 수능이 전부가 아닙니다. 수능이 다가온다는 것은 전체적인 대입 일정이 다가온다는 것을 뜻합니다. 면접 준비와 수학/과학 공부 때문에 점점 속이 타들어갑니다.


  그나마 화학은 자신 있었습니다. 화학 자체가 개념에 비해 추론/계산이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편이었고 화학에 대한 열정도 충만했으니까. 그리고 화학 선생님께서 저를 믿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점차 가닥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수학이었습니다. 수학선생님께 KAIST 면접 기출문제를 들고 가서 기하 관련 질문을 했다가 별로 좋지 못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어두운 표정으로 절 보셨습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매우 듣고 싶지 않던 말을 하셨습니다. 말씀은 길었지만, 요약하면 이랬습니다.


기본적인 개념도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 이런 문제를 푸는 게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맞는 말씀입니다. 다른 학교에서도 한 학기에 걸쳐 수업하는 내용을 이렇게 단기간에 공부해서 과연 제대로 된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분명 맞는 말씀입니다. 맞는데, 순간 울컥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이러고서 1차에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설령 붙었다고 해도, 내가 과연 이런 문제를 그 상황에서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점차 현실적인 공포가 저를 감쌌습니다. 동시에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인가. 선배들도 이런 두려움에 떨면서 앞으로 나아갔던 건가.


  제가 점차 초라해 보이는 겁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이런 말이 있죠, 청소년기는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가 가장 일치하지 않는 시기라고. 그래서 자신이 가능한 것보다 터무니없이 높은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초라하게 본다고. 제가 지금 딱 그런 상황입니다. 제가 계속 얘기했던 것 중에 6 우주상향이 있었는데, 사실 면접이나 자기소개서가 없다면 아무리 우주상향이라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와서 결과가 달라지진 않으니까, 그냥 지켜만 보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면접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선 1차가 붙을지 말지를 예측하는 것부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1차를 붙든 떨어지든, 일단 면접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트레스가 시작됩니다.


  10월이 넘어가면 중요한 건 자원 분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에 얼만큼 나의 시간과 노력을 쏟을 건지. 그리고 그 페이스를 얼마나 유지할 것인지. 수능 최저가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수능에 80% 이상의 자원을 투입하는 듯합니다. 특히나 4합 7의 고려대학교 같은 경우에는 뭐 하나라도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특히 탐구 과목들은 이제 등급을 올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국영수는 지금 해서 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탐구, 특히 개념 암기 위주의 사회 탐구 과목들은 지금이 막판 뒤집기 포인트가 될 수 있습니다.


  제 상황에서도 저에게 맞는 자원 분배 전략이 있을 겁니다. 교차지원이 섞여가지고 조금 난감하지만, 그래도 저는 수학에 몇 %, 화학에 몇 %, 학생부에 몇 %, 제시문 기반 면접에 몇 % 이렇게 분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본격적인 면접 시즌이 오지 않았기에 대부분 교과 기반으로 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학이랑 화학 개념을 빨리 끝내려고 하는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 마.'
'어차피 안 될 텐데.'
'너보다 훨씬 뛰어난 선배들도 못 한 일이야.'


  이러한 제 마음의 속삭임도,


'네가 이것 때문에 다른 중요한 걸 놓치고 있진 않을지 걱정돼.'
'현실적으로는 사실 어렵지.'
'지금 한다고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모르겠다.'


  저를 걱정해주시는 선생님들의 말씀도, 점차 제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모든 걸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와서 다 포기하고 싶어질 만큼. 지금까지 제가 믿고 걸어왔던 길이 막다른 길이었다는 걸.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요.


'하는 데까지 해보자.'
'되든 안 되든, 일단 해 보는 거야.'
'괜찮아. 잘할 수 있어.'


  이러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응원도 저의 부정적인 감정에 묻혀 갔습니다. 저에게는 더 이상 저를 끌어주고 밀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걸 혼자 헤쳐나가야 합니다. 솔직히 지금 당장 느끼는 감정을 말해보자면, 무섭습니다. 입시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내가 가는 길이 과연 맞는 길인가 하는 공포감이 저를 짓누릅니다.

작년 9기 선배들이 대입 관련 멘토링을 해주었는데, 그때 받아 적은 것들을 다시 펼쳐봅니다. 서러움, 짜증, 친구 간의 불화가 늘어날 거라고. 그래도 감정 소모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으라고.


나를 위한 취사선택


  원서 접수 후 면접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나에게 유리한 정보만 골라 들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정신이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모든 건 이미 던져진 주사위고, 지금 와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선택한 길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설령 그 길에 확신이 없더라도.


  자연계로의 교차지원은 고양국제고에 선례를 쓰는 일입니다. 인문계 절반과 자연계 절반, 사실 저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개척자들은 항상 불안을 안고 다닙니다. 선례가 없으니까, 그 길을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겁니다. 마치 칼 한 자루 들고 빽빽한 밀림을 탐험하는 것 같은 일입니다. 덩굴을 베고 길을 막는 것들을 치워가며 땅을 다져가는 작업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 불안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소가 존재합니다. 일단 우리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의 길을 걸었던 선배들, 그마저도 없다면 경험과 정보가 풍부한 선생님들이 계십니다. 저는 선생님들께 정말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응원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만큼 괴로운 게 없습니다.

어제 이후로 계속 울상이 되어서 기운 없이 위클래스에 내려갔습니다. 상담 일정을 잡고 왔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정보 선생님께 들러 자문을 구했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에 대해서. 제 방향성에 대해서.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이 길이 맞는지 조금 걱정이..."

  "어어 맞아 맞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쭉 가."


  푸념을 할 새도 없이 답을 주셨습니다. 지원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는 겁니다. 애초에 이공계열은 과학고나 영재학교 학생들을 선호합니다. 그런 학교에서 문과생을 뽑는다면, 그건 수학이나 과학 역량으로 뽑은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학생의 융합적 사고력, 성장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고 보는 게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계열 적합성은 떨어질지라도, 관심분야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돋보인다던가, 해당 계열에 지원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 점이 있는지. DGIST에서도 모집요강에서 그러한 내용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고등학교 계열 상관없이 지원은 가능하나, 수과학 계열 과목을 이수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문과생입니다. 수리 면접 문제를 과학고 학생들보다 잘 풀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1차에 붙었다면, 수학/과학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문과인 걸 알고 뽑았을 테니까. 물론 잘해서 수과학 역량까지 멋지게 뽐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테지만,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는지입니다. 뭐라도 알아야 풀어낼 수 있으니까요.


  KAIST는 항상 저를 짓누릅니다. 자기소개서랑 기타 서류 제출할 때도 계속해서 저를 갈궈왔습니다. 제가 웬만해서는 대학교 입학처에 전화를 잘 안 거는데, 한 번은 한국외대에 걸었고 KAIST에 두 번씩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깟 전화 건 게 뭐 그리 대수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가고 싶다는 열정이 있단 뜻입니다. 합격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걸 알면서도, 꼭 가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올해 제 최대 희망입니다.


  그리고, 저는 1차 결과에 상관없이 남은 기간 전력을 다해서 수과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라도 확신을 가져야지, 제가 확신이 없으면 누가 저를 뽑겠습니까? 지금 제가 겪는 일들을 나중에 회상할 수 정도로 최선을 다해보는 겁니다. 어떻게든 결과는 저에게 남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아도 말입니다.


  모두의 패러다임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저를 안 믿으면 누가 저를 믿어줄까요. 제게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면접에서도 면접관들께 저를 더 어필할 수가 있을 터입니다. 입시판이란 건 매년 바뀌기 때문에, 선배들의 사례가 100% 적용되지 않는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금은 제가 믿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통해 저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맞다고 생각하는 걸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것들이 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괜히 부정적인 이야기까지 잘못 담았다가 그게 저의 의욕을 꺾을 수 있습니다.


  GIST와 DGIST의 1단계 합격자 발표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먼저 제가 배운 미적분과 화학 I 으로 승부를 봐야 합니다. 문제는 KAIST입니다. 수능 다음 날에 1차 발표가 나는데, 그만큼 면접 시간도 길고, 제시문의 난이도도 높습니다. 제가 10월 모의고사에 기하와 화학 II 를 응시할 예정인데, 그때 저의 실력을 중간 점검해보고 공부를 이어가도록 할 생각입니다. 마침 잘 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제 주관대로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그 어떠한 유혹과 비방에도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저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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