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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Jan 15. 2021

후지산 정상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족을 알고 내려놓는 일에 대하여

 “야, 약속 하나 하자. 후회 안 하는 거야”


 혼하치고메 (本8合目)를 눈앞에 둔 어느 지점에서 친구와 나는 나무도, 아무것도 없는 후지산의 맨 바람을 맞으며 나아가질 못하고 있었다. 눈, 코, 입, 귀 뚫린 곳은 전부 화산재가 들어가 제대로 듣고 말하는 것도 힘들었다.


 나무가 없는 산을 오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후지산을 오르며 알았다. 나무는 빛과 바람을 막아주며, 흙을 땅에 잘 붙들어 매 준다. 나무는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내어주며, 우리가 산을 오르는 길만 오로지 볼 수 있게 해 준다. 후지산에서 나는 ‘왜 등산하면서 썬글라스가 필요할 수도 있는지, 바람막이를 입는지’를 이해했다. 화산재는 마스크를 뚫고 얼굴의 온갖 구멍 속으로 침투했다. 나무가 없는 산은 끝이 보이지 않는 멀고 먼 정상을 향해 뻗어있는 등산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끝도 없는 등산로가 지그재그로 보였다. 그 사이사이에 산장이 하나씩 있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내가 가야 할 멀고 먼 길이 한눈에 보이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기를 떨어뜨리기에 꽤 충분했다.



 우리는 너무 준비가 부족했다. 도쿄에서 후지산으로 가는 버스가 매진이었고 우리는 예매도, 미리 확인도 하지 않아 버스 타는 곳에서 어렵게 표를 구해서 1시간을 기다렸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일본에서 연휴의 시작이라 차가 막힐 수도 있다고 했고 실제로 그랬다. 우리가 집을 나온 지 5시간 만에 후지산의 고고메 (5合目)에 도착했다. 나는 전 날 밤에 야식을 먹고 체했고, 버스에서는 저렴한 가십거리를 말하던 서양 남자들 때문에 온통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여러모로 등산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르고 싶었다. 나는 화산, 지진 등 지질학에 관심이 많아 활화산을 오르는 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 같은 게 있었다.


 이미 고(5)고메까지 차로 왔기 때문에 산중턱부터 등산을 시작하는 셈이었다. 그래서 입구에서부터 구름이 발밑으로 깔려 있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나무가 없어서 등산하기 어려웠지만 나무가 없어서 가릴 것 없이 트인 경관을 감상할 수 있었다. 후지산에 가기까지 피곤한 여정이었지만 궁금했던 활화산을 직접 오르는 경험을 하는 것, 내 밑으로 있는 구름들을 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이 되었다.

햇빛과 바람을 막는 나무 없이 화산재로 가득한 가파른 등산로를 걷는 것은 꽤 지루하고, 고되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주변 풍경이 똑같고 갈 길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길과 바람이 험해 아무리 나아가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주변 경관을 느끼고 감상하는 건 처음 한 시간 정도였을 뿐이었다. 화산재와 사투를 벌이며 나나(7)고메까지는 평탄하다고 쓴 블로그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수월이고 평탄이야’라고 생각하며. 그러나 나나고메를 지나 하치(8)고메로 가는 길은 두 발로는 부족해 두 손까지 동원해 기어가다시피 하게 되자 블로그 주인을 용서했다. 점점 바람, 화산재, 나의 정신줄, 몸뚱이가 하나가 되어 가는 걸 느꼈다.


한 여름이었지만 해발 3200m에 다다르자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졌다. 낮은 기온, 고산병, 바람 등으로 정상으로 가는 길이 더 험해졌다.

 혼하치고메(本8合目) 즈음에서 우리는 서로 체력과 의욕을 거의 잃었음을 알았다.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던 친구는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고, 그때 하산을 해야 자정에나 집에 도착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친구는 내가 일본에 오기 전에 ‘후지산 정상에 가겠다’는 말을 늘어놓은 걸 생각해 ‘하루쯤 가게에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둘러댔다. 그러곤 ‘니가 원한다면 정상까지 가겠다’며 결정권을 나에게 넘겼다. 정상에 가기로 결정한다면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달할 때는 제정신에 결정을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른 변수들은 다 제하고 딱 하나만 생각했다. ‘지금 하산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정상에 오른다 한들, ‘이곳이 정상이다’라는 표지가 있다는 것 외에는 고(5)고메에서 하치(8)고메까지 가며 봤던 것들과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큐(9)고메를 지나 더 오르면 정상). 전날 체하고, 차가 막혀 늦게 도착했음에도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것, 평생 기억에 남을 멋진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내려가자”


 나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친구는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약속 하나 하자. 후회 안 하는 거야”

 “안 해”


 내가 무리하게 어떤 일들을 진행하게 될 때마다 그때의 하산을 떠올린다. 더 올라가도 다를 바 없을 텐데 나를 갈아내면서까지 바람을 이기며 오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고.


 그때의 내 생각이 옳았다. 나는 만족했고, 하산을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후지산을 오르고 싶었던 마음, 올랐던 용기, 멋진 추억 등을 소중히 하며, 무리함을 멈추었던 그날의 내가 옳았다. 앞으로 살면서 내가 충분히 노력했음에도, 많이 올라갔음에도 아등바등하는 때가 오게 되면 그날의 결정을 떠올리며 만족하고, 조금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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