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한 1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사랑할 수는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생각이 영화 대사로 나와서 나의 이런 생각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에 누군가가 했던 생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 대사를 한 사람은 노먼과 폴의 아버지, 공교롭게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 역시 나의 엄마와의 관계에서 시작했다. 나와 엄마는, 엄마와 나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서로를 완전히 사랑하고 있다. 이해에 기반한 사랑도 있지만 사실, 사랑에 기반한 이해가 더 많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넘어가는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유로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둑해진 계곡에 홀로 있으면 모든 존재는 희미해져 나의 영혼과 기억에 합쳐진다."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세상이 평화로울 때 나 역시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위와 같은 생각을 했다. 타자화, 대상화와 같이 약자는 끊임없이 세상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보면서 사랑에 기반한다면 이해하고자 하는 관심이 생길 테니, 모든 존재가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완벽하게'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었다. 미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폴은 도박 중독자이고, 노먼은 어쩐지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는 폴을 아름다운 아이라고 칭하지만 동시에 폴은 귀리를 먹지 않겠다는 강한 고집을 보이는 아이이기도 하다. 이곳의 인물들은 서로가 완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다양한 존재가 인정받고, 그러면서도 정의로운 세상에서 우리가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는 시대적으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시선도 드러난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폴의 태도, 노먼의 태도가 복잡하게 얽히는 장면과 특정 구성원 모두가 한데 어우러지는 장면이 대조되면서 '모든 존재는 희미해'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했지만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거의 떠났다. 하지만 다들 내 마음속에 있다.
삶은 유한하지만, 삶의 어떤 지점에서 내게 다가온 것들은 내 삶이 끝날 때까지 또는 내 삶이 끝난 이후에도 무한히 남는다. 내 삶의 어떤 관계는 끝이 나도, 그 관계에서 마주친 어떤 것들은 내 삶에서 조금씩 변하거나 무뎌지더라도 영원히 남는다. 그래서 사랑에는 무한한 확장성과 가능성을 포함한다. 내가 그전에 사랑에서 배운 것들은 이후의 다른 관계에서,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두니까.
"결국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한다. 대홍수로 만들어진 강은 아주 먼 옛날부터 바위를 타고 흐른다. 어떤 바위는 끊임없이 비를 맞았다. 바위 아래에는 말씀이 있고 말씀의 일부는 그들의 것이다. 나는 강물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 결국 흘러가는 사랑이 지나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이면서 나의 사랑이면서, 나의 사랑의 사랑이 되어 하나의 사랑이라고 표상되는 그 어떤 이상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이 비를 맞은 어떤 바위는 이전의 비와 지금의 비와 앞으로의 비가 구분되지 않지만, 끊임없이 비를 맞는 이 바위의 지금은 이전의 비와 앞으로의 비를 모두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굳이 첨언하자면, 이 영화에서 글은, 간결하게 쓰이고 마침내는 버려진다. 이 글 역시 이 영화를 보고 써 내려가는 것이니 영화에서의 가치를 담아내고 싶었지만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