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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단아 Sep 04. 2021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대한 어떤 단상

단아한 9월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를 사랑하지만, 이 도시가 토대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질 때마다 슬프다. 아침에 눈을 떠,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집안일을 하고, 내 작은 집 안으로 쪽 들어오는 햇살에 이 순간이 벅차게 느껴졌다. 어제도, 오늘도 좋은 날씨가 이어졌고, 나는 이 기분을 이어 학교로 갔다. 조금은 늦된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학교 앞 식당에서 먹은 파스타를 먹으며 이 하루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 사랑스러움까지 꼭꼭 씹어 먹었다. 학교는 언제나 그렇듯 예뻤고, 여전히 날씨는 좋았다. 학교 안에는 청설모도 살고, 고양이도 살지만 개미도 살고 지렁이도 산다. 또 내가 모르는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겠지.


분명 오늘 날씨 맑고 쨍쨍했는데, 어제도 날씨는 맑고 쨍쨍했는데, 대체 언제 비가 온 건지 도보 위에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흙에서 나온 지렁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 날씨에선 말라비틀어져 죽는다. 아니, 이 날씨에 아스팔트 위에서는 말라비틀어져 죽는다. 작년 여름 계곡에서 휩쓸린 나방을 물 밖으로 내보내 줄 때 엄마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될 일이고, 인간이 개입하는 게 좋은 선택일지 모르겠다는.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사람이 빠져 있어도 그렇게 할 거냐고 되물었던 것 같다. 내가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봤는데 지나칠 수 있겠느냐고, 했던 것도 같다. 내 개입이 괜히 잘못되어 더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다만 그때도 지금도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의도를 나방은 모를 테니까 내가 나뭇잎으로 옮기려는 행동이 더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거. 그래도 외면할 수 없었다.


어릴 때는 지렁이도 만지고, 콩벌레도 만지고, 쥐며느리도 만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동물을 만지는 게 하염없이 조심스러워졌다. 이들이 소위 인간에게 '혐오감'을 유발하는 동물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나는 개나 고양이를 만지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자리를 뜨지 못해 지켜보다가 도보와 단차가 있는 화단 위로 향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결국에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잡아 올려 흙 쪽으로 옮겨주었다. 내가 손으로 잡은 게 더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까? 아직도 조금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흙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까지만 보고 가던 길을 가서 완전히 들어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다시 잘 돌아갔기를, 그래서 자신의 생을 살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도시가,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가 아스팔트로 이루어져 있지만 않았어도 지렁이는 비가 오면 자연스레 밖으로 나왔다가, 맑아지면 다시 자연스레 흙으로 돌아갔겠지.


나는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이 도시의 편의성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도시의 편의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 잊기도 한다. 이 도시의 편의성은 지렁이는 물론이고, 비둘기, 고양이, 개와 같이 도시에 사는 동물들, 돼지, 소, 닭 이제는 도시에 함께 살지 못하는 동물들 모두를 배제하는 배타성을 기반으로 한다. 도보를 걸어가며 마주한 수많은 말라붙은 지렁이를 보며, 수많은 생명들을 배제하고 만들어진 이 도시가 가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나의, 누군가의 인위적인 개입이 없더라도 모든 생명이 자신의 생을 살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당장의 어떤 대안이 나타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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