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야’ 라고 하기엔 바람이 너무 셌다. 보이지 않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 마냥 하루종일 바람이 많이 불었다. 잠깐 잠잠해지나 싶으면 또 찾아오는 강한 바람이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좋은 점도 있었다. 낡고 녹슨 초록색 벤치에서 나뭇잎이 내는 소리와 파도가 부서지고 다시 살아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짝거리는 윤슬과 잘게 흩어지는 물방울,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와 그들의 날갯짓.
살랑이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잎까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소리였다.
기차가 빠르게 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아빠랑 똑같이 빨간 테두리의 선글라스를 끼고서는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순간 나는 사랑을 느꼈다.
한 금발의 소녀가 핑크색 헬맷을 쓰고 두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뒤에서 소녀가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면서 소녀를 응원했다. 소녀는 겁내지 않고 페달을 밟았고 아버지는 그런 소녀의 뒤를 쫓았다. 나는 또다시 사랑을 느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사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평생동안 저런 종류의 사랑은 느껴볼수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순간 평범한 사람들이 부러웠다가도 도대체 평범한 삶이라는 건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삶이라는 건 무미건조했으며 동시에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세상에 어떤 고민은 너무 하찮았으며, 어떤 고민은 무의미했고 혹은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 가끔은 심장이 투명한 색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치게 투명해서 어떤 사랑은 숨길 수 없게, 어떤 진심은 속이려고 해도 속여질수가 없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또 어떤 형태로든 드러난다. 영화 ‘클로저’에 보면 그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이 어디 있는데? 볼수도 만질 수도 느낄수도 없어!’
사랑을 믿고 싶어지다가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불꽃처럼 사라지는 순간들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건 실제로 존재했던 걸까 싶은 마음이 든다.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가다가 예쁘게 핀 벚꽃 나무 앞에 가만히 서서 꽃을 보았다. 나무 옆 이층 창가에 벚꽃만큼이나마 하얀 백발의, 포근한 햇살을 닮은 미소를 가진 할머니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또다시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늘도 사랑을 의심했고, 작은 것에 사랑을 느꼈고 또 가질 수 없는 사랑에는 절망과 가져보지 못한 사랑에 씁쓸함을 느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