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묘비명: 오해 금지

라팔리스, 버나드 쇼, 마타 하리

by 설애

죽은 후, 오해받는 사람들이 있다.


라팔리스의 진리

알베르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다가 각주에서 라팔리스의 진리와 관련하여 묘비명을 찾았다. 우연히 찾아낸 묘비명에 반가워 사진을 찍어 놓았다.



라팔리스의 진리(Laplaissade)는 프랑스의 귀족이며 군인인 자크 샤반 드 라팔리스(Jacques Ⅱ de la Palice, 1470-1525)의 비석에서 유래한 말로, '자명한 진리'를 뜻한다. 그의 묘비에 "Hélas s'il n'était pas mort (슬프도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Il ferait encore envie. (그는 아직도 부러움을 샀을 텐데)"라고 적었다. 그런데 후반부인 "Il serait encore en vie (그는 아직도 살아있었을 텐데)"로 잘못 읽히는 바람에,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의미하는 문장이 되어 '라팔리스의 진리'라고 불러지게 되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아직도 살아있었겠지. 묘비명의 오자도 아니고, 잘 적어 놓은 것을 잘 못 읽히는 바람에 오해받아서 억울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자신의 이름이 붙은 단어가 생겨 길이길이 이름을 남겨 좋아할리는 없겠지!


그의 적확한 묘비명을 다시 본다.


Hélas s'il n'était pas mort Il ferait encore envie.
슬프도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부러움을 샀을 텐데




우물쭈물하다가

아마도 제목을 클릭했을 때, "이 묘비명이 있을 거야"라고 예상할 수 있는 바로 그 묘비명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주로 버너드 쇼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그의 묘비명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이지만, 원문을 살려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즐겨했던 지적 유머가 사후에 한국에서 이렇게 구현되었다. 그는 억울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할 것 같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충분히 오래 머물렀으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나의 이름은

마타 하리(Mata Hari, 1876-1917)는 스파이로 알려진 네덜란드 시골 출신의 무용가다. 시골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많은 거짓말과 소문으로 사실을 숨겼다. 1914년 독일 정보기관에 2만 마르크를 받는 조건으로 포섭돼 암호명 'H21호'로 연합군 고위장교들을 유혹, 군사기밀을 정탐해 독일군에 제공해 왔다. 당시 그가 수집한 정보는 연합군 5만 명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고급정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암호는 무용가답게 음표에 알파벳을 대응하여, 암호 수업에서는 그녀가 계속 언급된다고 한다.

그녀의 묘비명은 그녀의 실명이다. 살아서 거짓 이름 속에 숨었던 그녀는 죽어서 실명으로 불린다.


Margaretha Geertruida Zelle


그녀가 스파이라는 것도 오해일 수 있다고 하고, 그녀가 넘긴 정보도 그렇게 고급 정보는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독일군 문서에서 실제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니, 그녀가 스파이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의 정보는 독일군에서 쓸모가 없어 페이자거(Versager, 불발탄)이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얽힌 이야기는 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활용되었다.



억울한 오해도, 웃기는 오해도, 영감을 주는 오해도, 묘비명에 있다.


하지만 어떤 오해에도 죽은 자는 반응할 수 없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