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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Mar 08. 2021

어느 쿠팡맨의 죽음에 부쳐


샛별배송, 로켓배송.. 물론 나도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고 삶의  향상에  도움을 받고 있는 서비스들이지만,

성질 급한 한국인의 사악한 종특에 부역하여 성공한 전략이기도 하다.

우리의 편의는 어떤 희생과 착취 위에 서 있는가?

플랫폼 경제란 요컨대 기술과 네트워크를 독점한 기업이 불황과 팬대믹으로 대거 발생한 유휴 노동력을 착취하여 살을 찌워나가는 구조다.

4차산업혁명 어쩌고 거창한 소리들 하지만 그래봐야 내몰린 사람들의 노동력을 갈아넣고 노동자의 고혈을 쥐어짜낸 악랄하고 착취적인 재래식 모델에 불과하다.

구조적 실업이 늘어나고 비자발적 실업자가 많기 때문에, 즉 싼 값에 잉여인력을 대량으로 동원할 수 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모델이라는 것이다.


어떤 피자 배달 전문점은 30분 이내 배달을 원칙으로 하며 늦으면 돈을 받지 않으니 사람들은 좋아했다.

배달이 늦어지면 배달원의 시급에서 음식값을 까기 때문에,

18세 김모 군은 비 오는 날에도 목숨 걸고 달리다가 버스에 치여 즉사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편해서 좋아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노동소외가 심각한 시장인데, 아무도 관심이 없다. 당장 내 삶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며, 배달노동자의 어두운 표정은 두꺼운 헬멧에 가려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그들은 타자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불쌍하다 하면서 음료수나 하나 건네면 도덕적으로 안락한가?


소비자만 편하면 좋은 서비스인가? 소비자를 만족시키면 다 좋은 기업인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기만 하면 다 성공해도 되는가?

누구나 편리함을 추구하지만, 나의 편리함이 누군가의 (비자발적)희생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라면, 돈 냈으니 응당 나의 권리라 여기며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면 안 되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배달노동자를 '딸배'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범죄성향이나 저학력, 노오력 부족 같은 악랄한 프레임을 씌워 그들의 고생과 고통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의 고단한 삶은 오롯이 그들 선택의 결과이며 그들의 노력 부족 탓인가?

기업이 제시한 비용을 지불했으니 그 대가로 제공받는 모든 서비스는 도덕적으로 문제 없는 것인가?

공동체의 한 구성원들을 이렇게 철저히 타자화하고 내모는 현상에 대해, 윤리적으로, 미학적으로, 아무런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는가?

그 안타까운 선릉역 사고조차 '자연사'라며 희화화하는,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사라진 그 조롱과 혐오의 시선이 과연 정상인가?

어느 고대생의 말처럼, 못 배워서, 공부 안 해서 배달노동자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못 배웠다는 게 남을 하대할 명분이 되는가?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그런 사실을 교묘히 은폐하고, 기술진보만큼이나 중요한 정치적 진보에 관한 사유를, 사유의 촉발 자체를, 담론을 가로막는다.


"고객님, 불편한 생각 마시고, 편안하게, 눈 돌리고, 외면하며, 우리가 제공하는 편리한 서비스를 그저 누리기만 하십시오."


우리는 그 달콤한 말에 취해, 거세된 현실인식과 누락된 감각으로 살아간다.

'어느 쿠팡맨의 죽음'에 있어,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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