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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with Fugue Oct 08. 2021

프랜시스 베이컨과 객체지향 존재론

십년도  , 군대에서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 손에 땀을 쥐며(?) 읽고  뒤로 내게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언제나 지고의 예술,  한편으로는 들뢰즈와는  다른 언어로 덧붙여 이야기해보고픈, 말하자면 산악인에게 히말라야와도 같은 존재였다. 다만 나는  공부의 얕음과 한계를  알고, 얕은 깊이로 함부로 이야기할만한 주제가 아님을 더욱  알기에 이제껏 수많은 미술 이야기를 하면서도 베이컨에 대한 언급은 의식적으로 자제해왔다. 그럼에도 이제는 뭐라도  마디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화석화되고 무기질화될까 두려워,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소심하게 운을 떼며 짧은 글쓰기를 시작해본다.


먼저 개념 하나를 간단히 소개하고 시작해야겠다. 가장 최신의 철학 중 하나인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이다. 자신이 비판하는 그 형이상학 전통을 답습한다는 지적이 늘 따라다니지만, 언어적 전회와 포스트구조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철학, 무엇보다 존재론적 전회에 관한, 현대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주체 중심의 철학을 무너뜨리는 저항의 사유로 그 의의를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실재성에 관한 현상학적 사유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종래의 사회과학을 효과적으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도 기존의 주체 중심의 지식 형식-또는 인식론-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사유를 환기해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내겐 미학, 예술 혹은 아이스테시스에 관한 사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함에 있어 들뢰즈의 유물론, 바디우의 비미학, 랑시에르의 반미학과 더불어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객체를 그 구성요소들로 환원해 기술하는 종래의 유물론과, 객체를 그 기능과 사회적 의미, 효과 등으로 환원하는 포스트모던 유물론, 이러한 '이중 환원'을 모두 비판하는 것이 하먼의 주저 <비유물론>의 핵심이다. 또한 하먼은 퀑탱 메이야수와 더불어 사변적 실재론자로도 불리는데, 사변적 실재론이란 결국 사유에 대한 사유, 사변의 전개를 통해 언어와 인식 너머의 실재성을 포착하고자 하는 철학이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예술은 언어 너머의 실재성에 관한 사유를 도와주는 보조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바깥'을 지향하고 지시하는 고유한 체계로 이해될 수 있다. 과학은 인식 범위 내의 객체들만 포착하고 그것을 지식으로 환원하여 주체에 귀속시킨다. 즉 언어/인식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성에 대해서는 설명, 아니 생각할 수조차 없고, 포착가능한 객체들도 언어로 환원되므로 실재성을 누락한다.


한편 예술은 그 밖의 실재성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또 다른 체계다. 예술을 통해 인식 외부의 존재와 접촉, 조응할 수 있고, '나'라는 객체와 상호 현상되어 하나의 미학적 단위체를 이루는 것이다. 작품과 감상자는 객/주로 분리되지 않고, 작품은 내게 감상되어야만 의미를 갖는다는 칸트적 상관주의는 극복된다. 그렇다면 미학은 예술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어떤 역할을 해내는지를 밝히는 게 아니라, 객체로서의 예술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그 존재특성에 걸맞게 연구하고, 행위자와의 연결성을 고찰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 이야기해보자. 베이컨은 언어에 포획된 감각, 지식으로 환원된 감각이 아닌 감각의 실재성 그 자체를 회화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해낸 화가다. 주체의 주관적 해석을 거친 지각이 아닌 객체 간의 유물론적 접촉, 그 현상된 감각 자체를 그려낸 것이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어떤 철학들이나, 가용한 지식만을 생산해내는 과학이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것은 다른 체계와는 전혀 다른 고유한 진리 생산 절차이며, 여기서 진리란 하나의 절대불변의 사실 따위가 아니라 실재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지식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세계, 언어로 개념화되기 이전의 실재성(무한성)을 회화라는 유한성의 세계 안에 표현/제시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형상과 윤곽, 아플라라는 '형식'이었다. 이 형식에는 미메시스나 서사, 정서, 지식이 배제되어 있다. 미술이 상관주의를, 곧 근대성을 벗어던지고 '바깥'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들뢰즈에게 바깥이란 곧 무의식이라는 내재성이며, 하먼에게는 해체된 주체(행위자) 외부의 '평평한 세계' 그 자체다.


베이컨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화살표 같은 장치들은 형상을 주관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일체의 지각 작용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이다. 베이컨의 그림을 마주하는 순간 그림 속 형상(객체)와 감상하는 자신(주체)의 구분은 허물어진다. 주객의 합일이 아닌 주체의 폐위, 객체화, 연결과 단절, 그리고 순환이다. 또한 이 지점에서 정치적, 윤리적 담론이 연역된다. "우리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는 문제제기로 우리는 주체 중심, 자기 중심, 인간 중심의 인식론적 틀에서 벗어나 객체 간 연결성과 네트워크를 사유하게 된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객체 중 하나라는, '필연적 우연성'에 대한, '외부'로의 사유의 문을 열어젖히게 된다. 인간 중심으로, 인간/비인간의 도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던 종래의 도식은 전복된다. 들뢰즈가 인식론보다 존재론을 우위에 두고 무의식(외부)과 잠재성을 사유하였다면, 하먼은 주체 개념 자체를 폐위하고 평평한 상태에서의 객체 간 네트워크, 그 창발과 공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이 철학의-철학적 미학의, 또한 반/비미학의 중요한 점은 이제까지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고, 성찰하고, 깨닫고, 교훈과 지식을 창출해내는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준다는 것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원자론적 개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사유와 담론의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개념의 내적 엄밀성이나 논증적 완결성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겠지만, '철학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 너머를 사유하려는 끊임없는 창조적/실천적인 운동/순환이며, 예술은 그런 철학의 가장 이질적이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다.


베이컨은 그 누구도 계몽하거나 교육하려 하지 않았지만 베이컨의 그림을 경험한 나 자신은 그 전과는 많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교양의 습득을 통한 주체의 고양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몰락을 야기한 추체험이었다. 나는 그 잿더미로부터, 그 평평하고 낮은 땅으로부터 모든 걸 새롭게 시작했다. 지금의 나 역시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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