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흙표범 Apr 12. 2023

시댁 형님과의 첫 대면, 폭발해 버린 나

부제 : 결혼, 꼭 해야 하나?

'결혼이란 거 만만치 않네. 이걸 꼭 해야 하나?'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결혼이었는데, 아주 아주 고맙게도 먼 가족 중에 한 명이 나에게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 사람은 에코(구남친, 현남편) 친형의 아내. 즉, 예비 형님이었다.


아직 결혼이란 게 정식으로 논의되기 전,

추석선물로 에코가 우리 부모님을 위해 준비한 한우세트를 내가 집으로 가져갔고,

그걸 받은 우리 부모님은 이미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처음 알게 된 '남친의 존재'와 딸의 남친에게 처음 받아본 '한우 선물세트' 두 개의 시너지는 어마어마했다.  


그 난리통에 에코가 전화를 했다.

"표범아, 언제 올라와? 일찍 올라오면 우리 엄마가 집에서 같이 밥 먹자는데?"

"어? 명절연휴 마지막날 오전에는 올라갈 건데?"

"그럼 그날 오후에 나랑 데이트하고,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는 거 어때?"

한우까지 사준 사람한테 인정머리 없이 그의 제안을 싹둑 자를 순 없었다.


올해 추석에는 에코의 친형 가족도 3년 만에 집에 왔다고 했다.

그 '3년만'이라는 표현에서 심상치 않음을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헛똑똑이였다.


"안녕하세요~~ 에코 여자친구예요"

나는 40대답지 않은 통통 튀는 흥과 밝은 목소리로 에코의 형과 형수에게 인사했다.

그간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하며 얻은 고마운 스킬은 '처음 본 사람과도 어색함 없이 얘기를 하는 능력'이다. 부서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친해져야 하고, 업무상 처음 본 사람과 회의도 하고 어쩌다 밥도 먹으며 키운 만렙의 스킬이 이럴 땐 참으로 고맙다.


"어머님, 저 xx이랑 산책 좀 다녀올게요"

나의 인사에 에코의 형수는 "안녕하세요"라는 말도 없이, 나를 한번 쓱 흘겨보고는 본인의 딸과 남편을 데리고 집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때까지도 나는 '낯을 많이 가리시는 스타일이신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하는 걸 내가 못 봤겠지'라고 그녀의 편에서 생각했다.




명절연휴 마지막날 저녁 진수성찬을 싹싹 먹고 나서도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형네 가족이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손녀가 있는 집은 모든 얘기의 초점이 손녀겠지?'

'나도 11살 차이 나는 막둥이 여동생을 키워봐서 잘 알지~ 귀엽지 암'

에코집에 들어온 지 2시간 반이 되어서야 온 가족이 얼굴을 보며 앉게 되었는데, 이야기의 모든 화제는 에코형의 딸내미였다. 초등학생 아이의 모든 말과 행동에 상에 앉은 모두가 반응하며 최대한 소리의 공백 없이 말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는 상황 속에서는 함께 동조하는 건 쉽고,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어렵다.

나를 포함해서 그 자리에 모든 어른들이 그 딸내미 얘기만 하길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나는 다음날 출근 준비를 위해 에코집을 나왔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본 나에게 인사치레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말 한마디 안한건 좀 이상하지 않나?'

'맞아. 나와 에코가 인사하며 집을 나올 때도, 형과 형수는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소파에 앉아만 있었어!!!'


그렇다. 형네 부부는 대화는커녕 내가 물어본 질문도 면전에서 대놓고 씹는 행태였다.

나와 에코는 마지막 인사까지 씹히며 현관문을 나선 거다.

오늘 처음 본 손님인 나도, 이미 그들의 가족인 에코도 유령취급을 하는 건 정말 상식밖이었다.

화가 주체가 안될 정도로 머리끝까지 솟았다.

어쩌겠는가, 우리 집에 바래다준다고 내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에코에게 그 화가 미쳤다.



"처음 본 손님을 이런 유령취급 하는 거, 나만 이상해?

집에 나올 때 인사도 안 받더라.

뭐 저런 상식밖의 사람들이 다 있어?"

에코 본인도 형네 부부의 행동이 당황스럽고, 처음 겪는 나의 '극대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형과 형수가 뭔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면서 나의 화를 좀 누그러트리겠다고 한 말에 나는 정말 폭발해 버렸다.


"초대받아 온 집에서  지금껏 이런 대접은 처음 받아보거든.

결혼이란 게,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과 엮여야 되는 거라면 나 너랑 결혼 안해."




알고 보니 '욕망'과 '시기심'이 원인이었다.

에코의 형은 좋은 대학을 나와 서울에서 제법 좋은 직장을 다니는 샐러리맨이다.

문제는, 형의 아내가 의 교육에 올인을 하면서 제주도 국제학교로 입학을 시키고 제주도에 세컨드 하우스까지 구입하면서 한국 내에서 두 집 살림이 시작된 거다.

주중에 형은 혼자 서울에서 일하고, 주말은 제주도로 가는데, 이게  누구나 꿈꾸는 삶일 수도 있지만, 사무직 월급쟁이에겐  빠듯한 삶인 듯했다.


형의 아내는 국제학교 같은 반 학부모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위축된 상황에 대한 불만을 에코에게 다 퍼붓는것 같았다.

에코의 형은 그냥 월급쟁이인데, 에코는 '사장님'소리를 듣는 것도 질투 나고(직원도 없는 1인 자영업자이지만), '혹시 부모님이 돈을 많이 지원해 주신건 아닌지', '그게 다 내 돈인데' 하는 마음까지 더해져서 이 사단이 났다.

에코와 에코의 여친에게는 인사도 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리는 '형수'나 아내 눈치를 보며 그걸 따르는 '형'이나...

사실 내 눈에는 유유상종, 초록동색이었다.





에코와 에코 부모님의 사과와는 별개로, 결혼이란 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서로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알콩달콩한 연애와는 확실히 달랐다. 나름 고생하면서 갓생으로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결혼으로 엮인 순간부터 등장인물의 규모와 에피소드의 다양성이 그간의 경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살짝 맛본 시댁식구와의 만남에서 지난 십 년간 가장 '극대노' 해버렸으니...


어릴 적 나는 '연민'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일까, 풀에 죽은 에코를 보면서 사랑하니 연민의 감정도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화가 좀 누그러지고 나니, 친형과 형수에게 그런 대접을 받게 된 에코가 짠해졌으니 말이다.

('나없으면 이 험한세상 누가 이사람 편을 들어주나'하는 인류애까지...)


사실, 에코에게 화가 난 건 아니므로 주변인 때문에 헤어지는 건 정도가 심한 것 같아 나름의 단도리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나는 형과 형수와는 절대 같은 공간에 있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명절에도 시간차를 두고 시댁을 가겠다는 확약을 받고 난 후,

우리는 다시 평상시처럼 40대 알콩달콩 모드로 돌아갔다.


물론, 나중에 '그때가 결혼에서 빠져나올 마지막 타이밍이었다'라고 땅을 치고 후회할 수도,

더 상식밖의 더 거대한 에피소드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경제학도로서 배운 '비교우위'와 '기회비용'을 적용해 보면,

아직까지는 '고독하고 외로운 혼자'보다, '에코와 함께 있는 재밌는 일상'을 선택하는 게 맞긴 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