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와 비(非) 채식주의자가 함께 사는 법
같은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식사 습관이나 취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통상적 예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들이 대체로 통용되는데, 다른 문화권마다 그 통상적 예의라는 것이 또 다르기도 하다. 예컨대, 어른이 먼저 드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예의인 문화권이 있고 함께 동시에 식사를 시작해도 되는 문화가 있는가 하면, 어떤 문화권에서는 남김없이 깨끗이 먹는 것이 예의일 수도 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조금 남기는 것이 되려 예의일 수도 있다.
집집마다 식사 환경이나 습관들이 다를 것이다. 우리도 달랐다. 나는 함께 식사할 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등을 켜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내 짝은 텔레비전을 켜 두고 식사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밥을 차려먹는 것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랐다. 나는 급식을 먹고 자란 한국인지라 국까지 갖추지 못하더라도 반찬 몇 가지를 차려서 먹는 것을 선호하는 반면 내 짝꿍은 한 그릇으로 끝낼 수 있는 음식을 선호했다. 나는 밥을 좋아하고 내 짝은 국수를 좋아한다. 나는 동물성 식품들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였고 그는 육식주의자까진 아니더라도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같이 살기 전에는 이런 것들이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같이 먹는 한 두 끼를 서로 배려하는 것은 매일 함께 식사하는 상황보다 쉬웠다. 그의 가족들과 식사를 할 때 한쪽에 텔레비전이 틀어져있어도 어쩌다 일어나는 한 끼 식사이기 때문에 굳이 나서서 텔레비전을 끌 필요가 없었고, 내가 완전 채식 요리를 고를 때 그는 고기를 사용한 요리를 주문할 수 있는 음식점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한국에 비해 채식 식당들이 많은 이 나라에서 채식인으로 사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하나씩 타협점을 찾아갔다. 함께 식사하는 동안은 전자기기를 잠시 멀리하고 서로에게 집중하기로 한다거나 밥보다 국수의 비율을 늘린다던지 하는 식이다. 내가 채식 요리를 만들고 있으면 그는 옆에서 고기를 굽는다. 그리곤 내가 만든 요리에 본인이 구운 고기를 올려 먹는 식이다. 그것이 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안한 그의 방식이었다면, 나는 더 이상 완전 채식주의자가 아닌 유제품과 달걀류를 허용하는 채식인이 되는 걸로 한 발 양보했다. 내가 요리해서 먹을 때에는 완전 채식을 하지만, 그가 나를 위해 한 요리에 가끔 우유나 달걀이 들어가 있어도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식사를 즐긴다. 나와 그가 함께 살기 위한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할 때에도 집게 등의 식기류를 두 개씩 챙겨 간다. 하나는 육류용이고 하나는 채소용이다. 그릴도 반반씩 구역을 나누어 굽는다. 한국에서 그랬다면 유난스럽다고 볼멘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분명히 불편한 일이니까. 그의 친구들은 오히려 나를 위한 비건용 콩고기를 챙겨 온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였다. 단지 채식 식당의 수가 많은 것보다 이런 채식인에 대한 생각/태도의 차이 덕분에 여기가 한국보다 채식인으로 살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내가 고기를 안 먹었을 때 직장 상사나 선배들이 싫어하는 것을 많이 겪어봤다. 내가 한국에서 일한 곳에서, 회식 메뉴는 언제나 고기였다. 처음에는 따라가서 밥에 된장국만 먹고 왔다. 그랬더니 입 짧다고 핀잔을 들었다. 밥 먹는 내내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혹은 왜 내가 고기를 안 먹는지에 대해 짧게, 그러니까 내 이유에 대해 딱히 관심은 없지만 들어줄만한 길이로, 설명했어야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안 갔다. 어른들은 내가 고기를 안 먹다는 이유로 회식을 빠지는 게 적잖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사회생활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고기를 안 먹게 되면서 겪는 일들을 통해, 어쩐지 남자들이 담배를 피워야 사회생활이 된다는 말이 조금 이해가 갔다. 고기를 먹어야 사회생활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은 고기를 좋아한다. 그런 문화에서 고기를 안 먹는 사람은 당연히 비주류다. 그리고 대다수의 나이 많은 어른들은 그런 비주류의 어린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여기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는 회식이 없다는 것이다. 정해진 근무 시간이 끝나면 각자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술을 권하는 문화도 없고 고기를 안 먹는다고 타박하는 사람도 없다. 특별한 날이 있을 때 가끔 동료들과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있다. 채식 요리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된다. 종종 왜 내가 채식을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윤리적 이유(ethical reason)이라고 하면 그뿐이다.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는다거나 내 걱정을 가장한 참견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정말 편하다. 각자 좋아하는 걸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긴다. 술과 고기 없이도 전혀 불편함 없이 나는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양가 부모님들께서도 나의 채식 식단에 대해 걱정하시는 중이시다. 흔히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는 말을 믿는 우리 부모님께서는 내가 어디가 좀 안 좋다고 하면 고기를 안 먹어서 그렇다는 말씀을 하신다. 나중에 아기를 가지게 되면 채식만으로는 영양분이 부족해서 아기에게 안 좋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게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님께서도 임신하게 되면 고기를 먹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분명, 그의 부모님도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걱정하시는 것 같다. 종종 그의 어머니께서 그를 위해 고깃국을 싸 주신다거나 종종 고기반찬들을 배달해주신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께서 슬며시 해산물이라도 좀 먹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오셨다. 우리 부모님처럼, 아기가 생기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셨다. 그때 짝꿍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되려 그의 어머니를 말렸다. 생소한 광경이었다. 만약 그가 나에게 '그래, 고기 조금만 먹어.'라고 했다고 한들, 나는 아마도 그동안의 경험에 기초한 익숙한 반응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을 것 같은데, 그는 "엄마, 그건 얘(필자)가 정할 일이야." 라며 막아섰다. 그러곤 나를 보며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너를 지지해. 네가 편한 대로 해."라고 말해주었다. 오히려 내가 당황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같은 이야길 하셨을 때 아기가 생기면 생각해보겠다며 둘러 댄 나와 달리, 부모님 앞에서 솔직하게 본인의 의사 표현을 하는 그가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 이후로 다시 그 이야기는 회자되지 않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나 그의 부모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 불편하진 않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시는 말씀이고, 내게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식사 초대를 받아 그의 부모님 댁에 갈 때면, 내가 먹을 수 있는 채식 요리를 두세 가지 따로 해두신다. 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지만 항상 감사하다.
나는 한국에서 육류만 먹지 않는 채식으로 시작해, 작년에는 완전 채식인으로 일 년 정도 살다가 지금은 약간의 동물성 식품을 허용하는 채식인으로 살고 있다. 채식을 한다고 해서 매일 샐러드만 먹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국도 끓여먹고 나물도 먹고 식물성 치즈로 피자도 만들어 먹는다. 달걀 없이도 쿠키를 구울 수 있고, 다양한 곡식, 과일, 채소들을 즐기고 있다. 요새는 콩고기 등의 비건용 음식들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서 해마다 채식인으로 살기가 쉬워지는 중이다.
채식을 하면 뭐가 좋냐고 물어보신다면, 일단 기분이 좋다. 어째서 기분이 좋은가 생각해보았더니 몸이 가볍다. 생선이나 고기의 비린내를 맡을 일이 없어 좋고, 늘 소화 장애로 더부룩하던 속이 편안해서 좋다. 한국처럼 척척 배달되는 24시간 음식점들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먹을 음식을 내가 해 먹는 즐거움이 있다. 과카몰리나 후무스 등 그 전엔 몰랐던 채식 메뉴나 요리법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집에서 요리를 하는 덕분에 나와 같이 사는 짝꿍은 한국 음식을 하나씩 섭렵해가고 있다. 어떤 날은 제육볶음 레시피로 본인은 돼지고기로, 나는 두부를 사용해서 같은 요리를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본인을 위한 연어 김밥과 나를 위한 채소 김밥을 말아주기도 한다. 요리라곤 하나도 모르던 사람이 나를 위해 뚝딱뚝딱 상을 차리는 걸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가끔 고기가 그립지 않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고기가 그립기보다 어떤 음식의 소스가 그리울 때가 있다. 예컨대 후라이드 치킨이 아니라 양념치킨의 양념 맛이 그리워지는 식이다. 그럼 양념치킨의 양념을 만들어서 튀긴 콜리플라워를 찍어 먹으면 된다. 초밥이 그리울 땐, 아보카도를 썰어 밥과 함께 또는 김에 싸서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찍어먹으면 된다. 고기가 없이도 나는 충분히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채식인이지만 일부 극성 채식인들이 하는 비 채식인들을 향한 비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본인이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고결하다고 생각해, 일종의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고기를 먹는 것이 야만적인 행위라고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개인이 결정할 일 아닌가. 내가 고기를 그만 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공장식 축산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지구가 돌연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에서 내가 먹을 것을 선택해서 살고 있고 그 과정에서 동물의 생명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실천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아기를 가지고 난 뒤에 내 입맛이 변할지도 모른다. 임신해서 병원에 갔더니 어떤 동물성 지방이 아이의 성장에 꼭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내 우선순위가 동물의 생명에서 내 아이의 건강으로 옮겨갈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 나는 채식을 하며 내 식단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오늘도 채식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