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나는 그에게로... "
" '그는 나에게로' 지! 다시!"
나의 중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우리 반 학생들은 아침마다 선생님이 판서하신 시를 열심히 공책에 베껴 쓰고, 하루 동안 달달 외워뒀다가 종례시간에 개별검사를 받고 하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단락이라 다들 쉽게 집에 갔었는 데, 누적되어 한 편을 암송할 때가 될 즈음엔 꽤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 남아 있었다. 옆 반 친구들 몇몇은 종례 시간이면 우리 반 창문에 매달려 자기랑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시 암송 테스트를 통과하길 유리창에 코를 박고 함께 기도했다. 때때로,몇 번이고 통과하지 못한 친구 쪽이 미안한 마음에 힘 없이 '먼저 가...'를 고하곤 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시골에 있던 조그만 학교였고, 우리 반에는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시키시는 담임 선생님을 향한 불만을 터트리기 바빴다.
"아니, 이거 시험에 나오나?"
"시험에는 나오겠지, 호빵맨이 낼 껄?"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땐, 선생님 뒤에선 이름도 별명도 막 부르고 그랬어요. 반성합니다.)
"쓸데없는 거 아이가? 이거 왜 외우는 건데?"
"아, 몰-라. 집 갈람 빨리 애아라."
초임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서 오신 담임 선생님께서는 급훈 마저 '처음처럼'으로 정하셨다.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말은 중학교에 갓 입학한 우리에게 향한 말이면서도 첫 담임을 맡으신 선생님 당신을 향한 말인 것 같았다. '애살맞다'는 사투리가 딱 그 선생님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열정이라는 단어에 집착을 좀 섞은 느낌이랄까.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자신이 맡은 일을 잘하고자 하는 욕심과 애착이 있는 상태로 주로 여성에게 쓰이는 표현이라고 한다.) 시 외우기 외에도 우리 반 숙제로는 예습장, 복습장, 일기장, 영단어 쪽지 시험 등이 있었고,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상벌제도가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우리 반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우리 반은 매일 종례 시간마다 괴로워하며 옆 반을 부러워했다. 지지리 복도 없다며 신세 한탄도 하고 담임 선생님이 전근은 안 가시냐며 갓 부임해 오신 선생님을 두고 허튼소리도 해 댔다. 종례 시간마다 옆 반이 부러웠다. 이 학교에 1학년은 두 학급뿐이라 옆 반으로 배정될 확률이 50%나 되는데 나는 왜 하필 이 반에 배정되었나.
우리 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하교를 목표로 시를 외웠다. 나의 이름을 불러달라며 외치는 김춘수 님의 마음이 어떠한 지 헤아릴 그릇이 아니었던 나는 그냥 외웠다. 밤마다 별을 헤고, 어느 날은 나타샤를 추억하셨던 윤동주 님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보다 오늘 집에 일분일초라도 빨리 가고 싶은 내 상황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벼락치기가 늘 그렇듯, 곧잘 외웠다가도 돌아서면 까먹었다. 선생님께서는 그럴 줄 알고 누적 암송을 시키셨다. 한 편씩 시가 쌓여갈 때마다 랜덤으로 골라 외워야 하는 시가 늘어나는 괴로움도 쌓여갔다. 그때 외운 시들이 꽤 될 텐데, 처음 외웠던 '꽃'이나 뒤이어 외운 '별 헤는 밤' 외엔 한 번 도 시를 읽어본 적 없는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내가 시를 좋아했는 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때 시는 내게 그저 숙제였고,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족쇄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시를 모른다. 절제된 아름다움을 음미하기엔 내 그릇은 여전히 너무나 작다. 내가 중학생 때 읽었던 시가 이십 년이 지나서야 조금 와 닿는 걸 보면, 지금 읽는 시는 또 다른 이십 년 후에나 이해가 될는지 모르겠다.
1학년 말쯤, 찬 바람이 불던 때, 나는 전학을 갔다. 도시에 있는 큰 중학교로, 학급 수가 14반까지 있고 반반마다 빈 틈 없이 책걸상으로 꽉꽉 들어차 있어서 사물함 자리 조차 비좁은 학교였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전학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새로운 선생님으로부터 약간의 관심을 받았다. 곧 학년이 바뀔 시기였기에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시골 중학교와 도시 중학교의 온도 차는 분명했다. 2학년으로 올라가고 난 뒤로 담임 선생님께서 나의 존재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가지실 일이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시를 외울 일이 없었고, 종례 시간은 대체로 십오 분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 내가 새로운 선생님의 이름을 불러드릴 일이 없었고, 선생님이 나의 이름을 부르실 일도 별로 없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라 몸짓 또한 몸짓 나름대로 새로운 학교에 적응해갔다.
학교에서 배우는 나이에서 가르치는 나이가 되어 종종 그 시간들을 추억한다. 미화되었든 왜곡되었든 나의 중학교 첫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꽃으로 성장시키시려고 많은 노력을 하셨다는 게 이제야 보인다. 김춘수 시를 봐도, 윤동주 시를 봐도 호빵맨 선생님이 떠오른다. 이제 그 당시의 선생님보다 더 늙어버린 나는 선생님 성함을 기억해내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기억이 난다. 동그란 안경에 어깨 선보다 조금 더 긴 머리를 하시고 볼살이 통통하셨던 모습도 떠오른다. 어느 날인가 중단발로 스타일을 바꾸고 오셨을 때랑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생각난다. 개별 시험을 보기 전 떼창 암송을 할 때, 교실을 천천히 왔다 갔다 걸어 다니시다가 단체 암송이 끝나면 들고 계시던 사랑의 매를 교탁 위에 내려놓으시면서 안경을 쓱 올리시곤 '먼저 할 사람 온나.' 하고 말하실 것 같다. 내가 가르치는 자리에 서 보고 나서야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본다. 그때 선생님께서 부려주신 '애살'이 사랑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