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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부부 Jun 06. 2022

시작과 끝

한국에서의 삶

제자리로 온 것인지,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는 도중의 휴식인지는 아지 모른다. 지난 30개월을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진짜 마침표를 찍은 것 같긴 하다. 우린 결국 세계일주를 다 하지 못했다. 

종종 사람들은 물었다. 

“여행하러 가서 일을 왜 하죠?!! 놀러 갔으면 놀아야지”


남편과 나에게 세계여행은 ‘놀다 와야지’는 아니었나 보다. 일을 하게 된 것은 취향이었고 우연한 길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여행지에서 생각지 못한 일을 하거나, 겪어보지 못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좋았다. 대게는 짧은 인연이지만 낯선 곳에서는 한걸음만 더 나가면 깊은 인연이 된다. 세상 곳곳에서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여행을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회는 사실 많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차리거나, 페인트칠을 하고, 열매를 따는 일, 물론 절대적으로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일을 하는 여행은 돈은 조금 없고, 시간이 많은 여행자라면 추천해 보고 싶은 방법이다. 


한국에 돌아와 강물에 내 던져진 것처럼 둥둥 떠 다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에 살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 있을 때 보다 한국이 더 낯선 곳으로 느껴졌다. 

‘새 출발’이라는 말처럼, 1 다음엔 2라는 숫자로 경계선이 분명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다시 시작점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듯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전개였다. 힘든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과거의 내 선택이 옳았는지 곱씹게 된다. 여행을 하기로 결정한 일이 옳았는가? 직선을 두고 비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또래에 비해 뒤쳐진 재력과 커리어를 가졌는지는 자로 재어줬다. 원래 출발선부터가 한참 뒤에 있었는데 거기서 또 한 번 쉬어가기로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엉망진창처럼 보였다. 그런데 여행을 할 때와 지금을 비교해봤을 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행자일 때 역시 돈도 없고 집도 없었는데 바뀐 것이라고는 장소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인도에서 케냐에서 레바논에서 이탈리아에서 우린 지금과 똑같이 가진 것이 없었지만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장소가 아니었다. 

비교할 대상들과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힘들다면 그것은 눈의 잘못일까? 생각의 잘못일까? 어쨌든 세상을 다시 보는 것으로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렇게 한국에서의 짧은 방황을 정리했다.


나는 모험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정글이나 사막을 모험하는 것 만이 모험은 아니었다. 이제 현실의 생존을 위해 밥벌이를 모험해야 한다. 나와 남편은 바쁜 오빠의 꽃집을 돕다가 지금은 꽃집 사장이 되어있다. 사실 말이 좋아 사장이지 쉴 틈 없이 바쁜 지옥의 자영업자가 된 것이다. 여행의 끝은 꽃집에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남편과 나는 의도치 않게 매우 일하는 삶을 다시 살고 있다. 평생을 어떻게든 한량으로 살아보려 발버둥 쳤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면 일도 할만했다.


나는 꽃 집 딸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 막일과 같은 꽃 일이 낯설지 않다. 가끔 가게 곳곳에서 엄마 아빠의 흔적을 볼 때마다 약간의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집을 떠나 있던 시간이 길어 부모님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했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부모님의 공간이었던 곳에 들어와 있으니 자주 '부모님'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다. 

얼마 전 가게의 안 쓰던 공간을 정리하다가 아빠가 읽던 책들이 몇 박스 나왔다. 

박완서 작가님의 티베트와 네팔 여행기를 쓴 모독, 인도 여행기, 배낭여행 잡지. 


이 많은 여행책들이 어떻게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는지, 아빠의 창고에 꼭꼭 숨겨져 있었다. 먼지 가득 쌓인 책처럼 아빠의 욕심도 몰래 혼자만 볼 수 있는 곳에 묻어 놓았다 생각하니 가슴속에 무엇인가 왈칵한다. 누군가 다녀온 여행기를 보며 욕심을 삼켰을까? 책에 나온 여행지는 내가 가 봤던 곳이 많았다. 작가들의 묘사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다른 세계는 시간은 한국만큼 빠르게 흐르지는 않는 것인지 몇십 년 전 기록된 모습과 최근에 내가 봤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자랑스러우셨을까? 연금술사의 주인공이 마지막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나는 제일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꽃집의 품으로.

사람에겐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생각할 여러 번의 기회가 필요하다. 그 기회가 많을수록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기회는 시간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온전한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이라는 핑계로 걱정만 하다가 그 시간을 다 쓰기 일쑤다. 혹은 시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가도 캄캄한 미래 때문에 다시 백지로 돌아가 일상을 살아낸다. 기회를 주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간다. 


여행의 마법은 낯선 공간의 분위기와 시간이 주는 온전함이다. 그 둘로 만들어진 여행은 비로소 내 속을 뒤집어 살피게끔 한다. 우린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무엇을 새로 시작하고 싶은가? 어떤 것이 나를 설레게 하는가? 과거의 나는 어떠했는가? 미래의 나는 어떠할 것인가? 골치 아프다는 핑계로 멀리 치워 놓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집을 사고, 어떤 차를 사고, 어떤 가방을 들 것인지에 대한 목표 대신 '나'에 대한 답들 말이다. 


나는 울산에서 새로운 삶은 시작되었고 여행은 끝이 났다. 그 여행이 우릴 어떻게 변화시켰냐고 묻는 다면 아주 사소한 몇 가지가 있다. 남 얘기보다 내 얘기에 더 귀 기울일 것, 내 인생은 이미 완벽하게 채워져 있으므로 작은 빈자리를 물건을 사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늘 여행하는 마음가짐으로 살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상이와 다시 한국에서의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설레기도 한다.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생각했지만 영 빈손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계속될 모험을 준비하며 살고 있다. 그 이야기를 이어서 할 수 있을 날이 오길! 챠오! 바이! 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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