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고등학교 친구들이 처음 우리들만의 여행을 떠났던 때를 막 스무 살이 되던 겨울로 기억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무사히 다녀온 게 유일한 의미일 정도다. 동서울터미널에 모인 우리는 각자 들고 오기로 한 먹을 것들이 잔뜩 담긴 커다란 백을 각자 들고 버스에 올랐다. 특히 중요한 게 술이었는데, 잭다니엘을 공수해오기로 한 친구는 기대하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강릉 터미널에 내린 우리는 택시를 나눠타고 숙소인 리조트로 향했다. 바닷가에 있는 낡은 리조트였는데 겉에서 보기엔 여기가 사람이 자는 곳인지 담력체험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을씨년스러웠고, 내부도 뭔가 고풍을 넘어서서 확실히 어딘가부터 문드러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아마 숙박인원을 한두 명 줄여서 예약을 했을 텐데, 막상 직원은 원래 그런다는 듯 무심하게 방 열쇠를 내어줬다.
중앙 계단을 두고 방이 양쪽으로 배치가 되어 있었는데, 한쪽에만 얼추 스무 개가 넘어보이는 문이 마주보고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은 우리 포함 셋 정도 였다. 경제관념이 아직 제대로 서 있지 않았던 나이였음에도 난 '이래서 장사가 되나?' 싶었는데 아마 얼마가지 않아 망했지 싶다.
낡은 티비에선 지역방송 밖엔 나오지 않았고, 당연히 이불에서는 미세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우린 웅웅 소릴 내는 냉장고에 먹을 걸 바로 집어넣고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창문을 열어봐도 놀랍게도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바다 코 앞 숙소에서, 빈 방이 그렇게 많은데 왜 바다 보이는 쪽을 주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바로 뛰어내려가서 추가금이 드는 거면 낼테니 바꿔달라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땐 일차적으로 용돈도 빠듯했고 무엇보다 뭔가 그런 일에 나설만한 깜냥 같은 게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귤을 먹기 시작했다. 마치 부업이라도 하러 온 것마냥 우린 귤 상자를 가운데 두고 둘러누워 말없이 귤을 흡입했다. 귤을 까는 방식도 나름 천차만별이어서 꼭지를 푹 찌르는 놈부터 일단 반을 가르는 놈, 사과를 깎듯이 껍질을 한 줄로 까는 놈도 있었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꼭지부터 아래쪽으로 껍질을 벗기는데 밑둥 부분은 일부러 떼질 않고 남겨서 결국엔 꽃받침처럼 만들어 알맹이를 빼낸다.
그러나 시간은 가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차라리 씻고 잠이라도 잘 텐데 그땐 하필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이어서 그 정도 버스 여행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니면 밖에 나가서 경치 구경을 하든 어디 볼만한 곳을 찾든, 시내구경이라도 하든 할 텐데, 그때 우린 택시비 한 푼이 아쉬웠고, 미리 찾아놓은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얼음이랑 우유 사와야 해."
너나 할 것 없이 우린 모두 얼음과 우유를 사기위한 원정대마냥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린 나간 김에 PC방에 가기로 했다. 시간을 죽이는데는 역시 PC방만한 게 없었으므로. 강릉까지 가서 왜 PC방에 가는 건지에 대한 의문보다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전략회의에 돌입했다. 초반러쉬를 해야 한다, 아니다 포토캐논을 잘 깔아야 한다, 요즘 포토러쉬가 유행이라더라, 그러다 역러쉬 당하면 우리가 진다. 마치 귤무덤에서 부활한 것마냥 우리는 그 사이 죽어있던 목소리를 마음껏 사용하며 어둑해진 강릉 시골길을 걸었다.
슈퍼도, 피시방도 보이질 않았고, 우리는 지리를 몰랐고, 결국 길을 잃고야 말았다. 그러나 우린 그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일단 피시방을 찾아서 거기서 지도를 보면 된다는 개중 하나 그나마 정신을 붙들고 있었던 친구의 말에 힘을 얻기도 했거니와, 아무리 그래도 우린 함께였으니까.
기억나는 거라고는 한 학교 옆을 지나갔는데 그 학교 운동장에 잔디가 (인조잔디인지 천연잔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깔려있어서, 열악함의 극치였던 우리 고등학교에 대한 성토대회가 벌어졌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숙소로 돌아온 우린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장엄하게 잭다니엘을 열었다. 난생 처음 위스키라는 걸 마셔보는지라 가슴에 불길이 휙 타오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로된 불이라니.
"그때 우유를 마셔."
지금껏 살면서 그때 마셨던 우유처럼 달콤한 게 없었다. 아, 잭다니엘은 우유 마시려고 마시는 거구나 했을 정도로. 병은 금세 비었다. 술 담당이었던 친구는 자신의 히든카드를 공개했다. 데킬라였다.
이미 소금이고 레몬이고 필요 없을만큼 짜고 알싸하게 취해있었기에 우린 데킬라도 넙죽넙죽 집어삼켰다.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2박 3일 일정이었는데 첫 날은 PC방 다녀온 다음 술 마시고, 다음 날은 숙취에 치여 다들 죽어있느라 시간이 다 흘렀다. 그렇게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서로 말은 안했으나, 이럴거면 우린 대체 왜 강릉에 온 것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일출이라도 보자."
그랬다. 우리에겐 뭔가 제대로 된 이유가 필요했다. 생각해보니 그 2박 3일동안 제대로 바다도 보지 못했다. 평소에 절대 맞춰놓지 않을 시간에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었다. 그렇게 일찍, 그것도 평소와는 다른 시간에 일어나려면 보통 잠이 안오는 법이다. 난 그 밤 내내 뒤척거리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알람을 가장 먼저 들은 것도 나였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등 불을 켰다.
"나가자."
친구들은 계속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느라 움직이려 들지 않았는데 난 어차피 잠도 설친 김에(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노래 한 곡에 꽂히거나 읽어야 할 책이 있거나 하면 걸핏하면 밤을 새곤 했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자면 된다는 생각으로 옷을 챙겨입고 혼자 밖으로 나갔다. 어둑한 바다엔 시야를 밝혀줄 뭔가가 없었던 것 같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 울려퍼졌다.
솔직히 피곤하고 추웠다. 뭔가 정신이 멍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일출이라니. 난생 처음 보는 일출이라니. 하늘도 맑았기에 이 정도면 잘 보이려니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파도가 훅 밀려오더니 발을 적시고 떠났다. 단번에 운동화가 다 젖어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버티고 서 있을만 했는데 발이 젖어버리자 온 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온 친구들은 내 꼴을 보더니 어서 양말이라도 갈아신고 오라고 했다. 한참 일출을 보겠노라 고집을 부리던 난 결국 못 버티고 숙소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돌아와보니 해는 둥실 떠 있었다. 친구 중 한 놈이 이렇게 말했다.
"멋있었다."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이후로 일출과는 인연이 없다. 새해 정동진에도 가봤고, 남산도 가고, 한강에도 나가고 20대 때는 일출을 보기 위해 특히 새해에는 나름 명소라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제대로 된 일출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늘 구름에 덮여서 하늘이 밝아지는 것만 봤지, 노른자처럼 바알갛게 떠오르는 해는 구경도 못했다. 나이를 더 먹고 나서는 아예 포기다. 일출을 본 날 내내 생체리듬이 깨져서 헤롱거리느니 안보고 만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건 아마도 애를 써도 제대로 된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태양이란 놈은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는 판단이 선 까닭도 있다.
그때 일출을 본 우리는 강릉 시내로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난 축축한 운동화를 끌고 돌아다니느니 그냥 버스터미널 대합실에 앉아있기를 택했고, 나머지도 사실 어딘가를 돌아다닐 힘이 없었다.
그래도 끼니는 해결하고 버스를 타는 게 맞지 않느냐는 말에 우린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밥을 시켰는데 무슨 무신경함이었는지 모두의 메뉴가 달랐다. 순두부찌개, 김치찌개, 된장찌개, 부대찌개 같은 식이었다. 식당 아저씨는 괜찮다는 듯 주문을 접수했다. 잠시 후 나온 음식을 맛본 우리는 그 초연함의 이유를 알았다. 각자 서로의 음식을 한입씩 맛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맛이 다 같았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마저도 그랬다.
이후로 우리는 여행을 떠날 때는 나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 녀석이 본인 성격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이 '우린 계획 같은 거 잘 모르겠고, 딱히 취향이랄 것도 없고...'라고 가스라이팅을 해놓은 덕분에 일정과 비용을 입력하면 계획을 잘 출력해서 내놓는다. 대신 이 친구가 다른 건 몰라도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완전한 J다보니 문득 이게 여행인가, 전지훈련인가 헷갈릴 때가 있긴 하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우린 오사카에 다녀왔는데 첫날에만 3만보를 걸었다. (22.67킬로미터를 이동해서 2,765kcal를 태웠다. 외운 건 아니고 그때 휴대폰 어플 캡처해놓은 게 남아있다.) 이후 국내여행엔 그냥 각자 스타일대로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때 도킹해서 놀곤 한다.
언젠가 꼭 일출을 봐야한다 하면 일단 석 달 전부터 기상시간을 천천히 앞으로 당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게 몸에 익으면 일출이 잘 보일만한 각도로 자리잡은 동해안 어딘가의 숙소를 한 열흘 정도 잡는다. 거기서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을 걷고 바다를 본다. 커피 한 잔 두고 보면 더 좋겠다. 열흘이면 운 좋게 하루 정도는 맑은 아침이 있을 테고, 그럼 날 싫어하는 태양이라도 어쩔 수 없이 대면을 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성실한 녀석이니 어쩔 수 없이 맑게 떠오를테다. 이쯤 되면 충분히 '대작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직까지 태양을 보겠다고 이만큼 정성을 쏟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넌 너의 길을 가고, 난 나의 하루를 살면 된다. 그 정도 사이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