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구가 일과시간에 뜬금없이 내게 '이 런던 날씨 같은 남자'란 카톡을 보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채 그 '런던 날씨'란 단어가 꽤 그럴싸하고 있어보여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이럴때면 난 나름 쉬운 사람인 거 같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자기소개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싶었다. "저는 런던 날씨 같은 남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음, 흥미로운 스타트가 되겠군.'
'영국, 런던'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순서대로 빅벤, 셜록홈즈, 왕실근위병, 피쉬앤칩스, 까만 택시가 다였다(아, 다시 생각해보니 축구가 있다. 그런데 난 야구 말고 다른 스포츠는 거의 안본다. 이 얘긴 나중에). 톡 하나 툭 던져놓고 회의를 하러 갔는지 친구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어서 난 물음표만 남긴 채 해석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돌아온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일년에 맑을 날이 며칠 없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라 맞다며 카톡창에 'ㅋ'을 수없이 연타했다. 사실 내 상태에 비하면 런던 날씨는 양반이다. 난 언제나 흐림, 매우 흐림, 약간 흐림이지 맑을 날이 거의 없다. 기분상태가 아니라 몸상태다(기분 상태에 관해서는 상황이 안좋아도 히죽히죽 잘 웃고 다닌다). 몸이 어딘가는 고장 나있는게 기본 값이다. 반년 정도만 같이 지내도 주변 사람들이 "헤비님은 안 아픈 날이 있기는 해요?" 라고 물어본다. 그렇다. 요즘도 계속 몸살기운이 있고 두통에다 가끔씩 어지럽고 그런다.
실제로 어릴 적엔 겨울이 그렇게 좋더니 이젠 좋아하는 계절도 가을로 조금씩 옮겨간다. 서글프지만 기분 탓이 아니고 신체 컨디션 탓이다. 겨울이 되면 몸이 더 아프다. 비염이 심해져서 늘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야 하고 몸살감기약도 달고 살다보니 위장장애도 세트메뉴로 딸려온다. 아직 공감을 못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기다려보면 다 알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까(아이고야, 진심 덤덤하게 하는 말인데 왜 심술난 거 같지...).
진짜 나만의 일은 아니다. 나이를 먹다보니 겨울이면 부고가 더 자주 들린다는 걸 느낀다. 생각해보면 내 생일이 11월인데 거기서 일주일 지나면 친할아버지 기일, 거기서 다시 한 달 지나면 외할머니 기일, 또 한 달 지나면 친할머니 기일이다. 지난 12월엔 부모님이 장례식장에만 일주일에 세 번 가시는 것도 봤을 정도니까 어쩌면 겨울에 몸이 아픈 건 자연의 이치인가 싶기도 하다.
친구들 말로는 난 반려동물이 아닌 반려감기를 키우는 것 같단다. 이 말도 부정할 수가 없다. 한번 감기가 시작되면 외롭지 말라고 아예 한 계절은 동거를 하고 간다. 도리어 어느날 컨디션이 좋다 싶으면 뭔가 낯설고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아내가 친정에 간 것처럼(네, 전 아직 다녀온 적 없는 미혼입니다).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만,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특히 일을 시작하고나서 갑자기 20킬로그램 이상 살이 붙었다. 괜히 스스로를 '헤비'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난 나름 자기객관화가 분명하고 주제파악이 빠른 사람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렸을 적에도 난 스스로를 못생겼다 생각해서 사진 찍는 걸 싫어했는데, 군대에서 막 나왔을 때 찍힌(확실히 찍은 게 아니다) 사진을 지금 보면 그냥저냥 볼만하다. "어휴, 턱선이 있네." 한다. 지금은 매일매일이 정월대보름이라 내키면 정화수 떠놓고 거울에 대고 소원을 빌어도 된다.
운동을 하면서 이런 고민을 하면 말이 되는데 운동을 안하면서 고민만 하는 게 진짜 문제이긴 하지만, 체력은 좀 키우고 싶은데 체격은 그냥 이대로도 별 상관이 없지 한다. 물론 몸을 만들어야 반려감기 대신 반려자를 만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질책이 있다. 가끔은 섹시하게 사는 인생은 어떤 걸까 하는 본질적인 궁금증도 생긴다. 곰곰히 생각하면 좋긴 하겠으나, 솔직히 부러우나, 허락된 내 길은 아니지 싶다.
얼마 전, 정확히 헤아려보진 않았는데 거의 오륙 년만에 친했던 후배 여자애를 만나 밥을 먹었다. 워낙 남자들이 알아서 주변에 몰렸던 친구라 왜 결혼을 안하고 있나, 혹시 비혼주의인가 하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웬걸 요즘들어 난생 처음 어떤 남자한테 자기가 먼저 마음을 뺏겨서 휘청휘청 하고 있는 중이란 얘길 들었다. 그 순간 오랜만에 만난 남의 연애사에 (월척이구나, 에헤라디야!) 왜 그리도 신이 나던지. 마침 그 남자가 나랑 동갑이어서 내 또래 남자는 매력적인 여자가 거의 들이대다시피해도 왜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심리분석 작업에 들어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너지레벨은 떨어졌는데 책임져야 할 일은 많다. 이 나이 먹도록 솔로로 지내면 연애에 에너지를 쏟는 게 어색하기도 하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도 우선순위에 연애가 꽤 많이, 저 멀리 밀려나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있고, 조금만 노력하면 아직 해낼수 있을 것 같은 일이 있고, 차마 놓지 못하는 일도 있다. 그게 앞에 촘촘히 쌓여있으니 연애가 눈에 잘 안들어온다.
"그러니까 니가 가서 우리 어떤 사이냐 그런거 물어서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다이렉트로 좋아한다고 말해." 라고 했는데, 후배는 평생 고백을 받기만 하다 이제와 고백을 하려고 하니 입이 안떨어진다고 했다. "그게 다 니가 지금껏 울리고 마음 앓이 하게 만든 남자들에 대한 업보다 생각하고 사귀고 싶으면 니가 고백을 하라고!" 참고로 우리 둘은 교회에서 만난 선후배다.
모르겠다. 후배가 진행상황을 알려주겠다고는 했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됐는지 아직 답을 듣진 못했고, 결국 남의 연애사의 진도가 어디까지 빠졌는지를 꼼꼼히 확인할만큼의 체력이 내겐 없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그래도 마음이 생기면 에너지레벨을 거슬러 결국 맨 앞에 오는 게 사랑 아닌가? 오죽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인다는데. 모를 일이다. 내가 콩을 끊은지가 하도 오래됐나보다.
딴 얘기로 하도 많이 새긴 했는데 다시 말하지만, 체력은 키우고 싶어도 체격을 만드는 일은 관심에서 멀다. 결론적으로 운동은 건강하려고 하는 건데, 건강은 정신과 몸의 균형이 유지되는 거라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체격을 예쁘게 만드는 건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싶다. 당장 체력이야 갑자기 시작하게 된 이 소품집 연재만 제대로 마무리하려고 해도 꼭 필요하지만.
그래도 또 모를 일이다. 내 눈앞에 누가 쓱 나타나 "살 빼고 몸도 만들면 그래도 그나마 데리고 다닐만 할텐데..."하며 환하게 웃으면 갑자기 PT등록을 할지도 모른다(물론 안다, 그나마 데리고 다닐만 해지려면 리모델링이 아니라 싹 허물고 재건축이 필요하단 걸). 원래 나란 인간이 그렇게 얄팍하다. 내일 쓰러져도 좋으니 모든 우선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 잠깐 상상만 해봤는데, 기분은 좋다. 물론 가능성이야 극히 희박하다 못해 엄밀히 말해 절망적이라 표현하는 게 맞겠지만.
예전 어떤 드라마에서 배우 수지 씨를 '농약같은 가시나'라고 부른 적이 있다. 이 아찔함이란. 그래, 원래 모든 사랑은 건강에 해로운 것이다. 난 원래 건강이 안좋으니까 혹여 오시려거든 부디 감기 정도로 오시라. 더 심하게 오시면 내 부고가 먼저 그대를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하시라. 생각해보니 감기도 꽤나 사랑과 닮았다. 기침을 감출 수가 없고, 몸에 달라붙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고, 실상 완벽하게 치료할 약도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오고, 언제 왔는지 모르게 깨닫고 나면 이미 온 몸이 점령당해있다. 심하면 밤새 앓느라 잠조차 들지 못한다.
좋다. 내일은 꼭 사이클을 탄 후에 산책을 가기로 하자, 내일은. 찾아보니 지금 런던 날씨는, 비바람에 오후부터 갠다고 한다. (며칠 전 처음 글 쓸 땐 어인 일로 하루종일 맑음이더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