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해,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
소품집 3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엔 잠실 롯데월드에서 주변 아파트 주민들에게 놀이동산 티켓을 가끔씩 보냈던 걸로 안다. 꽤나 오래전인게 빅3, 빅5 같은 티켓이 있었을 시절이니까. 아무래도 놀이동산이다보니 밤 늦게까지 소음도 심하고, 빛공해도 있고, 인파 때문에 주변 교통도 복잡해지고 하니 불편해도 양해를 바란다는 의미였을 걸로 짐작한다.
나는 그 사실을 주변에 사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녀석은 유효기간이 지나기 전 티켓을 써야 한다며 몇 번이고 롯데월드에 같이 가자고 했다. 이 친구는 나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의무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서, 내가 알을 깨고 나오기만 하면 한계 이상의 뭔가를 해낼 거라 믿는 걸로 보인다. 자기가 데미안이고 내가 싱클레어인 셈이다. 문제는 어릴적에 그랬던 건 그러려니 하는데, 이 나이에도 포기를 모른다. 진정 불굴의 의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알의 종류가 하필 주량 늘리기, 안 해본 취미생활 하기, 안 가본 곳 여행 가기 같은 것들이어서 정녕 이게 내 껍질이 맞나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그때도 그랬다. 녀석은 내게 롤러코스터'만' 타자고 했다. 어차피 자유이용권도 아니고 야간개장이라지만 방학이라 사람이 많을 때여서 여유있게 탈 형편은 되지 못하니 집중공략이 필요하다는 데는 나도 동의했지만, 왜 하필 롤러코스터만 타야 하는지, 그게 내 무얼 바꾸기 위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 난 롤러코스터를 타본 적이 없었다. 솔직히 겁도 났고, 나로서는 왜 스스로를 그 고난의 행군에 집어던져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공짜라는 게 날 강하게 자극했고, 주말 야간 놀이동산이 주는 무한한 만남의 가능성이 내게 없던 용기를 솟게 해줬다.
우린 잠실역 롯데백화점 지하 분수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이제 거길 하도 안 지나다녀서 그게 아직도 있는지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녀석은 여자친구와 같이 나와 있었다. 발밑이 쑥 꺼지더니 내 모든 기대를 들고 광속으로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아, 오늘은 정말 롤러코스터만 타겠구나. 친구의 강력한 목적의식에 못내 서운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었다.
정작 그때 뭘 탔었는지 정확하지 않은데, 녀석의 차림만은 꽤나 선명하게 남아있다. 편한 슬리퍼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며칠동안 집에서 계속 입고 있었던 것 같은 츄리닝 바지까지, 평소에 그렇게 편하게 입고 다니는 캐릭터가 아니어서 내가 도리어 놀랐다.
"너 이러고 나왔어?"
"집 앞인데, 뭐."
그 차림으로 여고생의 인파를 거침없이 뚫고 다닐 수 있는 그 초연함에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날은 놀이기구를 타느라 긴장이 되어서 나중엔 별 신경도 쓰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날 이후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으니 그나마 작은 껍질이 날아간 셈이긴 한데, 대신 놀이동산에 갈만한 다른 핑계가 생기지 않았다(이제 가봐야 백퍼센트 조카들 돌보느라 허리가 휠테다).
친구의 초연함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된 건 그 일 이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난 평소에도 일이 없으면 밖엘 나오지 않고, 밖엘 나오지 않으면 잘 씻지 않는다. (반대로 나갈 일이 있으면 무조건 씻고, 돌아와서도 바로 씻는다. 그리고 요즘은 매일 밖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삶이다. 인간적으로 이런 부분에는 부디 오해가 안 쌓였으면 좋겠다.) 며칠이고 그러다가 이러다 내가 못견디겠다 싶음 씻긴 하는데, 그래도 면도는 잘 하지 않는다.
이런 타이밍에 가장 애매한 순간이 집 근처로 오는 친구의 방문이다. 당연히 문 밖을 나서니 씻어야 하는 것까진 맞다. 그런데 과연 면도를 하고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가 문제다(이런 고민 앞에서 난 꽤 진지해진다). 거울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의 험악함 때문에 받는 영혼의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면도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가도, 이상하게 친구를 만나는데 면도를 한다는 건 그야말로 옛 성현께서 말씀하셨듯이 '과공이 비례'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이럴때 보통 승리하는 건 덜 귀찮은 쪽이다.
난 후줄근이란 단어를 의인화한 형태를 하고 친구를 만났다. 후줄근이 꽃이라면 내가 밟는 곳마다 꽃밭이 되는 기적을 볼 수 있었을테다. 우린 피시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 팀플레이를 했다. 늘 그렇듯 반은 이기고 반은 졌다(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저녁 먹을 때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냥 컵라면이나 짜장면으로 때울까 했는데 녀석이 갑자기 말했다.
"돈까스 어때?"
이 친구는 돈까스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만난 모든 사람 중에서 최고 권위자여서, 오래전부터 이 친구와 함께 '돈까스기행' 같은 걸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을 정도다. 남자 둘이 전국 방방곡곡 돈까스만 먹으러 다니는 거다. 제육볶음, 순대국과 함께 남자의 3대 소울푸드라 불리는 돈까스는 사실 최상의 맛을 찾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음식이다. 우동면이 기온이나 습도에 따라 반죽을 달리 해야한다고 하지만 돈까스도 때론 옷에서 밀가루 맛이 날 때가 있고, 때로 육즙이 살짝 더 빠져 퍽퍽해지고, 때로 훌러덩훌러덩 옷을 벗고 나타날 때도 있는 등...
각설하고 돈까스를 먹으러 가자는 말에 난 무심코 콜을 외쳤다. 그때 우리는 강동구에 있던 무한리필 돈까스 집에 자주 갔는데(이젠 무한리필을 해주지 않는다. 물가 인상이 불러온 서글픈 현실이다) 이제와 미안한 얘기지만 거기도 후줄근함에 있어서는 나 못지 않은 곳이었기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후줄근한 내가 후줄근한 돈까스 집에 가서 돈까스를 먹고 친구의 차를 타고 후줄근한 우리 집에 무사히 돌아오면 되는 완벽한 일정이었다.
진공청소기마냥 돈까스를 흡입하고 있는 찰나, 친구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른 친구였다. 어디에 누구랑 있느냐는 질문에 친구는 나랑 돈까스를 먹고있다고 했고 대화가 짧게 이어지더니 (온 신경이 돈까스에 쏠려있어 난 그들의 대화를 다 듣진 못했다) 이번엔 친구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OO이가 친한 누나 카페 오픈했다고 오라는데 갈 거야?"
"지금?"
"무조건 오라던데?"
"어딘데?"
"가로수길."
기계적으로 입에 구겨넣은 돈까스가 아니었다면(그 집에 가면 돈까스 6장은 먹고 나와야 한다는 혼자만의 의무감에 묵묵히 과업을 수행중이었으니까) '니들 나 가지고 몰카찍냐?'소리가 터져나왔을 테다. 내가 아무리 내 멋에겨워 사는 인생이라 한들 이 꼴로 가로수길에 나타나는 건 양심의 문제요, 국가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행위였다. 난 집에 갈 거라고 고갤 저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난 갈 건데?"
너무 멀리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고, 차 키는 놈에게 있었다. 그는 질문을 했으나 선택지를 주진 않았다. 내가 바들바들하고 있자 친구는 말했다.
"안심해, 아무도 너 안 쳐다봐.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 그리고 거길 이 꼴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오직 그 동네에 사는 애들 뿐이야. 너 스스로 마인드를 바꾼 다음 당당하게 다녀보라고."
이제서야 알거니와 후줄근에도 종류가 있어서, 가로수길의 후줄근과 잠실 아파트단지의 후줄근과 동묘의 후줄근과 우리 집에서 생산된 후줄근은 말만 같지 그 종이 다르다. 같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살아도 캥거루와 코알라가 다른 것처럼 다르다. 하지만 그땐 그것을 몰랐기에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난 그날 저녁 늦게까지 가로수길을 놀랍도록 당당하게 휘젓고 다녔다.
어쩌다 어릴 때보다 요즘 신사동이며 강남, 가로수길을 더 자주 가게 된다. 반은 놀러 가고, 반은 일하러 간다. 1층에 줄줄이 나붙어있는 '임대문의'를 볼 때마다 난 그때가 생각난다. 어쩌면 그날 내가 뿌린 후줄근의 씨앗들이 자라나 여길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묘한 미안함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날 갔었던 친구의 친한 누나의 카페도 오래 가지 않아 문을 닫았다.
그날 이후로 난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가끔씩 주변을 살피곤 한다. 친구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나 말고는 누군가를 쳐다보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인기척을 느끼고 기분 나빠 할 수도 있기에 대놓고 한동안 빤히 쳐다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흘끔흘끔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시선이 휴대폰에 묶여있거나, 창 밖을 보거나, 눈을 감은 채 잠들어있다.
내가 발가벗고 있거나 갑자기 괴성을 지르지만 않으면 아무리 후줄근해도 이 무관심의 그늘에서 벗어날 일은 없다. 이 그늘 속에서 나도 주로 안심을 하지만 가끔은 문득 외로워진다. 예민해서가 아니다. 모두가 안심해선 안될 것 같아서, 누구 한 명쯤은 외로워하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그러고 있다. 누군가 이걸 후줄근한 마음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