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 못 견뎌 증후군

소품집 1

by 헤비

무형이든 유형이든 어떤 존재가 너무 오랜 시간동안 몸에 붙어있다보면 그 존재에 대해 좋아한다거나 혹은 소중하다거나 하는 표현을 하기에도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냥 그 존재는 거기에 있다가,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가, 어느새 그 존재가 내게 붙은 건지, 어쩌면 내가 그 존재에게 붙어있었던 건 아닌지 헷갈리게 된다.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란 작가가 그렇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후 지금껏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다. 새 작품이 나올 때까지는 읽었던 책을 보고 또 봤다. 흔하디 흔한 하루키 키즈. 누군가 내 목소리에서 그의 머뭇거림과 쉼표를 느꼈다 하면, 난 싫지 않고 왠지 다행이라 여길 것 같다. 이렇게나 오래 붙어있었는데 그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다르다는 게 내겐 언제나 못내 아쉽고 불편한 일이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글에 대한 거의 전부를 '데릭 하트필드'에게서 배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트필드를 '모든 의미에서 불모의 작가' 라 하는데, 하루키는 '불모'란 단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모든 의미에서 '불모'의 작가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트필드는 글을 무기로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뛰어난 작가 중 하나였다. 헤밍웨이, 피츠제럴드와 같은 동시대의 작가와 견주어도 하트필드의 그 전투적인 자세는 결코 뒤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하트필드 자신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싸우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결국 불모라는 건 그런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윤성원 번역


하루키의 작품 안에는 막막한 초원 위에 누워있는 봄날의 곰처럼 나른하고 포근한 문장들이 셀 수 없이 등장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애정신도 꽤나 남발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저 문장 하나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그 순간 그가 내게 날아와 박혔다.


"자신은 마지막까지 자기가 싸우는 상대의 모습을 명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명치를 정통으로 맞은 사람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난 나도 모르는 새 내가 이름을 '하트필드'로 개명했었나 했다. 물론 그때 난 글쟁이를 꿈꾸는 고등학생일 뿐이었다. 글을 무기로 삼아 싸울 줄도 모르고, 어디 하나 뛰어난 부분이 없으며, 지망생조차 통과 못했으니 당연히 작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너무나 완벽한 내 얘기였다. 문장은 읽기 힘들고, 스토리는 엉망이고, 테마는 치졸하며, 주먹을 아무리 휘둘러도 허공만 가를 뿐 내가 싸우는 상대의 모습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맞았다기보다 뚫렸다에 가까운 상태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난 저 부분을 몇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어이없지만 조금은 통쾌하기도 했다. 글을 쓸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과 막막함이 내 가슴 속에 있는 불모의 사막 때문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이 사막을 어떻게 건너야 하는 건지, 과연 건널 수는 있는 건지, 하루키는 그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깨닫는 게 과연 모르는 것보다 나을까? 깨닫는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새해 다이어트 책을 산다고 살이 빠지는 게 아니고, 토익 책을 산다고 영어가 자신있게 튀어나오지 않는다. 카페인 중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미간을 찌푸린 채 뚫어져라 보면서도 내 손엔 여전히 커피 잔이 들려있다.


도리어 내 상태를 깨닫고 나니 문제가 심각해졌다. 전보다 불모의 증상이 선명해져 버렸다. 깊은 곳에 파묻혀있어 몰랐는데 가슴이 뻥 뚫리고 나니 만나고 싶지 않았던 괴물이 '짜잔'하고 얼굴을 드러낸 셈이다.


이후 글을 쓰려고 하얀 종이나 하얀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런데 그 흰 종이 앞을 떠날 수도 없었다. 써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데, 시작할 첫머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잡아먹는 건 예사가 되었다.


"1938년 6월의 어느 맑게 갠 일요일 아침, 하트필드는 오른손으로는 히틀러의 초상화를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우산을 펴들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한때 흰 종이 앞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다보면 나도 언젠가 하트필드처럼 어디 높은 빌딩 옥상에 올라가 우산 하나 들고 뛰어내리는 게 아닐까 싶은, 시간대가 뒤틀린 기시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그 불모가 좀 나아졌을까? 아니다. 지구의 사막화를 가속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데, 나도 인간으로써 제 몫(?)의 어리석음을 잘 수행하고 있기에 사막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흰 종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애써 뭔가를 써봐도 다음 날이면 '어제의 나'녀석이 쓴 문장의 진의를 해석하지 못해 암호문을 풀듯 진땀을 뺀다.


난 이걸 '흰 종이 못 견뎌 증후군'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어쩌면 어딘가 이런 증상에 관한 정확한 이름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 밖에서 보면 이 세상이 엄청나게 작지만, 인간이 살기에는 쓸데없이 넓기도 해서 어딘가에 이런 특이한 증상만 연구하는 사람이 한둘(그 중 한 명은 영국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은 있게 마련이다. "그건 흰 종이 못 견뎌 증후군이 아니라 논아르히테이트 이펙트라고 합니다."라면서 복잡한 수식이 적힌 논문을 펼쳐들고 내게 정정을 요구할지도 모르지만, 일단 무시하기로 하자. 내가 더 찾아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장 내 앞에 놓인 흰 종이 하나 못 견뎌서 바들바들하는 처지에 팩트체크나 자료조사를 할 여력이 있을리 있나.


게다가 내가 내 증상을 '흰 종이 못 견뎌 증후군'이라 부르든, '외로운 명왕성의 지위 회복을 위한 절필로 인한 금단현상'이라 부르든 이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여전히 난 글을 쓰기 위해 흰 종이를 마주하면 햇살 좋은 여름날 정오에 한참 길을 걷다 자신의 손등을 핥았을 때 느껴지는 염분 농도 정도의 불안감이 밀려든다. 그리고 때로 불안은 조금씩 키가 자라 정신을 차리고보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한동안 이 증상을 피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했다. 일단 뭐라도 적을 걸 미리 찾아보자 싶어 수첩에 미리 생각나는대로 제목이나 주제 역할을 할만한 단어들을 적었다. 허나 막상 내 안에는 그 뒤를 이어 쓸 말이 없다. 정신을 차리면 종이 위에 마중물 역할을 할 줄 알았던 그 단어만 빼곡히 적혀 있다. 그 사이로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이 분다. 차라리 그 모래바람이라도 어떻게든 문장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난 그 방법마저도 모른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사오정이 '나바앙~~~'을 외치면 입 안에서 나방 떼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나도 차라리 입을 벌리면 모래라도 한 움큼 울컥 토해졌으면 싶을 때가 있다.


한때는 시중에 나와있는 작법 서적 중 유명하다는 걸 많이 찾아 읽었다. 워낙 배움이 짧은 터라 책을 보고 있을 땐 갑자기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눈이 밝아진다. 책을 덮은 후 '그래, 이것만 따라하면 나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거야.'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종이 앞에 달려간다. 현실은 가혹하다. 채 일 초도 지나지 않아 모래바람은 가소롭다는 듯 작법서에 나와있던 문장들을 꿀꺽 집어삼키고 윙윙거린다.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기로 유명한 요리경연 대회의 심사위원처럼 내 다짐과 계획들을 쓰레기통에 고이 처박는다.


그래,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해.


이미 난 실질적으로 포기한 상태다. 아예 다른 분야로 넘어와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쪽 분야의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어도 가끔씩 스멀스멀 글쓰기의 마수가 꿈틀거리며 손목을 휘감는 걸 보게 된다. 가시돋힌 촉수가 허리를 감싼 후 어깨를 타고 넘어오려 한다. '왜 문장이 이렇게 장황해지고 쓸데없는 비유가 들어가기 시작하는 거야.' 난 황급히 새로 페이지를 켜고 딱딱한 숫자들로 글쓰기의 넝쿨을 내리찍는다. 하지만 알고 있다. 난 언젠가 굴복하고 말 거다. '넌 글을 쓰고 싶어진다.'며 까만 모자를 쓴 마녀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이쯤이면 숫제 저주를 받은 셈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경계선에 서서 우물쭈물 하는 게 지금 내 삶이다.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것 또한 증상에 썩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임을 안다. 글은 쓸 수록 쓰고 싶어진다. 남들은 쓸 수록 글이 는다는데 난 그게 없어 탈이다. 그럴거면 모래벌레가 사는 사막 속 프레멘이 아닌, 이 사회의 무난한 일원으로 살기 위해 글쓰기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라도 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어 더 탈이다.


다시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가보자.


내게 글을 쓰는 일은 몹시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한 달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사흘 밤낮은 계속 썼는데 그것이 모두 엉뚱한 내용인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삶이 힘든 것에 비하면 글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중략)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윤성원 번역


'데릭 하트필드'는 실존인물이 아닌 하루키가 만든 허구의 인물이다. 어찌보면 하루키는 자신의 불모를 하트필드라는 사람에게 투영해서 고백한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면 이 모래바람을 맞으면서도 조금은 숨이 트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이후 그의 불모는 끝이 났을까? 아니면 그 후로도 하루키는 자신의 사막을 계속 걷고 있는 걸까? 내 책장 한 자리를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그의 이야기들은 그 사막 속에서 태어나 내게까지 닿은 걸까? 그리 생각하면 적어도 불모가 이야기를 멈출 이유는 아니란 뜻 아닐까? 난 내 사막을 향해 단 한 발이라도 제대로 내딛은 적이 있긴 한 걸까? 저 곳이 불모의 땅이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미리 단정지은 채 들어가지 않을 핑계만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사막을 쉽게 건너지도 말고, 사막을 없애려고도 말고, 그저 내 안에 사막이 있다는 사실과 마주할 용기가 언제가 되어야 생길까? 그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는 영영 알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딘가에 사막이 있어야 어딘가에 숲이 있고 그 너머에 바다가 있듯이 내게 '흰 종이 못 견뎌 증후군'이 있어야 언젠가 '흰 종이 못 잃어 증후군'도 오게 될 거란 걸 언제쯤 내 모든 세포가 인정할 수 있을까?


그래도 여기 모래바람을 맞으면서 한 가지는 다짐하기로 하자. 웃자. 헤매느라 허탈해져도 웃고, 비명 끝에도 피식 웃음으로 마침표를 찍자. 웃어야 힘이 생겨서 이 사막을 건널 수 있을테니까? 아니다. 그냥 지금 여기 텅 빈 종이 한 장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아릿한 무서움을 느끼는 내가 할 수 있는 그나마의 최선이 웃는 것 뿐이니까 웃기로 하자. 사막을 걷는 건 내 일이겠지만, 사막을 건너는 건 내 몫이 아니다. 잊지 말자. 그냥 웃자. 그리고 가끔 문득 생각이 나면 그래도 이 힘겨운 삶 속에서 몇 글자를 적을 힘이 남아있다는 것에 감사도 해보자.


이제 부터 적어볼 내 모든 이야기들에서 서걱서걱 모래냄새가 나도 너그러이 양해를 바란다. 진심으로 미안하지만,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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