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빨간 원피스가 내게 달려오던 날
소품집 5
나 포함 5명의 친구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비슷한 시기에 군대를 갔는데, 놀라울 정도로 다섯이 각각 다른 환경으로 떨어졌다. 공군부대 헌병, 후방사단 신병교육대, 지하철공익, 그리고 최전방 GOP, 마지막으로 난 경찰서 전투경찰이었다. 우린 군대 얘긴 잘 하지 않는데, 군대 얘길 꺼내봐야 각자 너무 달라 접점이 없기도 하고, 몇 번의 토론 끝에 이미 결론이 어느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군대에 오래 있었던 건 공군부대 헌병, 몸이 가장 힘들었던 건 최전방 GOP, 가장 정신이 피폐했었던 건 나다. 가끔 지하철 공익이 '나도 힘들었다' 고 우기며 쓱 겸상을 하려고 하지만 나머지는 아침, 저녁으로 집밥 먹는 건 애초에 군대 취급을 해주지 않는다(당연하잖아!!).
각자의 군대얘기가 다 그렇겠지만 전투경찰 시절 얘기는 꺼내놓으면 그야말로 대하드라마다(일단 태조왕건 O.S.T부터 틀고 시작하자). 매일매일이 사건사고의 연속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겪어보지 못할 일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다른 전경 출신보다 내가 조금 더 버라이어티하게 보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걸 보고 들었던 시절이다. 내가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경험할 수가 없었다는 게 문제여서 그렇지, 곱씹어볼 얘기도 나름 꽤 있다.
전경이 아예 없어졌으니 이제 자유롭게 말하자면 경찰서 전경의 가장 큰 장점은 외부 외출이 일정부분 자유롭다는 거다. 경찰서에서 먹고 자니까 대부분 시내에 있고, 애초에 외박이나 휴가를 나가려면 사복을 입고 나가야 해서(경찰 정복을 입고 나가게 만들면 무슨 기상천외한 문제가 터질지 모르니까) 관물대에 사복 몇 벌이 있어야만 했다. 정문을 통제하는 게 다 전경 후임이다보니 사복 입고 두어 시간 쯤은 밖에서 일을 보고 (그래봐야 슈퍼나 도서관, 피시방에 가는 정도지만) 들어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계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고참들은 내무반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안이 바깥보다 확실히 더 편하다.
다른 장점은 포상으로 외출 외박이 꽤 많이 나왔다는 거다. 내 기억에도 두 달에 한 번 2박 3일 휴가를 썼고 다른 포상까지 붙이면 정기휴가가 아닌데 4박 5일도 써봤다. 심지어 우리 경찰서에 있던 의경 방범순찰대가 타온 포상도 같이 주어졌는데, 이 친구들이 포상을 곧잘 타오는 엘리트 부대였다(우리한테 밥도 해주고, 포상도 주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존재들이었다). 원래 외박은 위수지역이라고 해서 해당 부대의 지역을 벗어나면 안되는데, 우린 그걸 풀어줘서 각자 집에 다녀올 수도 있었다. 집에 가야 그나마 조용하지, 지역에 풀어놔봐야 니들이 사고밖에 더 치겠냐는 윗분들의 생각은 무척 정확했다(왜냐? 나중에 한번 묶어놓으니 보란듯이 진짜 사고를 치더라).
군대에 간 아들이, 친구가 오랜만에 머리 빡빡 깎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처음에야 죽었다 살아온 듯 반갑고 애처롭지, 이게 두세 달에 한 번씩 계속 나오면 어느 순간 이후론 집에 사람도 없고 연락도 잘 받아주지 않는다. 만날 사람도 점점 없어진다. 심지어 다시 말하지만 친한 친구들은 그맘때 다 군대에 있었다. 보통 만나야 다 대학 여자 동기들인데 이 친구들도 자기 연애하고 졸업 준비, 취업 준비 하느라 바쁘다.
그 휴가 때 보기로 한 건 동기 누나였다. 난 재수생이고 누나는 삼수생이어서 학번은 같았지만, 그쪽이 한 살 위였다. 우리 과 우리 학번에서 가장 예뻤던 두 명 중 하나였고, 아니나다를까 초반에 수많은 남정네들이 누나를 두고 지들끼리 난장판을 벌였으며, 결국 한 선배(이자 나랑 동갑)와 사귀었는데 그때는 이미 헤어진 다음이었다. 난 사실 누나가 아닌 우리 과 미모 투 탑 중 다른 친구랑 더 친했고, 첫 휴가때도 올라오자마자 그 친구랑 밥을 먹고 집으로 갔고, 틈만나면 연락을 해댔고, 당연히 그 친구에게 사심이 있었다. 누나랑 보기로 한 것도 그 친구가 일로 고향에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그 누나 별명은 한때 지금의 라이언보다 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마시마로였는데, 웃을 때면 꼭 마시마로처럼 눈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떠올려봐도 진짜 웃는 게 귀엽고 예뻤던 기억이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렇게 정확하고도 예쁘게 웃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 싶다. 연예인도 아닌데 주변이 환해진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우린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당연히 할 일이 없었던 난 한 시간쯤 일찍 나가서 책을 보고 있었다. 휴일이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없는데 사람이 많았다. 그때 난 누굴 기다리는 일에는 나름 익숙해져 있었는데, 그게 다 평소에 자주 만나던 (고향에 내려간) 그 친구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모든 약속에 꼬박꼬박 30분 늦게 나타났다. 시간을 맞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제대 이후 화가 난 내가 일부러 30분을 늦어봤더니 한 시간 늦게, 아예 한 시간이 늦으면 놀랍게도 무슨 핑계로든 한 시간 반 이후에 나타났다. 일부러 약속장소가 보이는 곳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30분 기다린 걸 확인한 다음에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 지각 습관은 끝내 변하질 않았다.
지금이야 오래 서 있는 걸 싫어하지만 그땐 서가 구석에 서서 한참동안 책을 읽는 게 꽤나 몸에 밴 습관이었다. 하지만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큰 자리가 없는 사람이라 한들, 미인과 데이트를 하는 건 두근두근 한 일이니까. 심지어 난 현직 군인신분이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심장이 멋대로 속도를 높이면 두뇌는 기능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애를 써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책을 덮었다. 미리 만나기로 한 자리에 나가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지난지 아마 10분 쯤 지났을 거였다. 지하철이 오갈 때마다 계단은 쏟아진 인파들로 가득찼다. 난 혹시나 싶어 두리번 거렸지만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이번 열차도 아니군.'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세계 미인 연합회 같은 데서 <우린 약속시간에 20분 이상 늦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30분까지는 늦어도 문제없습니다.> 라고 주기적으로 공문을 보내는 게 아닐까?' 그런 공상을 하며 혼자서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그래, 이 정도는 경찰서 정문 보초 선다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지. 익숙해, 익숙하다고.
딱 그 순간이었다. 아래쪽에서 급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 빨간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고, 한 손엔 하얀 코트를 들고, 갈색에 부드럽게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세상 바쁜 일이 생긴 것처럼 그녀는 엊그제 내린 눈 때문에 물기가 묻어있는 계단을 위태로이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누나였다.
나도 모르게 미끄러질까 싶어 마지막 계단을 올라온 누나의 팔을 붙들었던 것 같다. 누나는 숨을 몰아쉬며 늘 그래왔듯 하얗고 환하게 웃었다. 그때 마침 계단 위쪽에서 겨울 햇살이 이 아래 깊은 곳까지 포슬포슬 흩날리며 내려왔던 것도 같다.
"미안, 늦었지?"
"얼마나 늦었다고 그래요. 다치면 어쩌려고."
"너 기다릴까봐."
그 이후 내가 쓴 모든 글 속의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향해 빨간 원피스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그녀들이 이야기 밖으로 나온다면 하이힐 뒷굽으로 내 뒤통수를 내리치고는 '제발 그만 뛰자!'며 버럭 소릴 지를 게 분명하다). 배경 계절은 수시로 바뀐다. 때론 구두 대신 운동화여도 좋다. 심지어 빨간 원피스가 아니어도 괜찮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향해 달려오는 게 그렇게 현기증 나는 일이라는 걸 난 그때 처음 배웠다.
그래서 장난으로라도 함부로 누군가를 향해 달려서는 안된다. 특히 하얗고 환한 미소를 가진 여성분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상대가 무릎을 꿇고 다짜고짜 고백을 할지도 모른다. 아님 평생 그 장면을 잊지 못해서 우연히 그 자리에 가면 당신을 생각하느라 가던 길을 멈춘 채 괜히 웃고 서 있을 수도 있다.
하필 우리가 그날 본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목마'가 울려퍼지고 하울이 소피의 두 손을 잡고 왈츠를 추듯 허공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할 때,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으로 물들어있던 누나의 미소 띈 두 눈을 난 여전히 기억한다. 그러니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 하면 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최고라고 말 할 수 밖에.
아마 지금 누나는 듬직한 남편을 보디가드처럼 옆에 두고 꼭 자기처럼 환하게 웃는 딸 둘 쯤 키우며 잘 살 거다. 소식을 주고 받은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럴 거라 확신한다. 나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지 싶다. 그러나 혹여라도 시간이 한참 더 흘러 몇 개의 우연이 겹치고 겹쳐 우리가 다시 만날 약속을 잡게 된다면 어김없이 그 광화문 교보문고 앞이어야 한다. 누나가 갑작스런 단발머리에 편한 단화를 신고 바지정장 차림으로 나타나도 내 눈엔 여전히 그 빨간 원피스의 그녀가 웃으며 서 있으리라. 그날 그 시간의 우리 둘은 여전히 그 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