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다보니 간혹(이라 하기에는 의외로 자주) 불륜 관련 이야기를 듣는다(미리 말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불륜은 혼인이나 연인 관계에서 헤어지고 만나다가 중간에 잠시 겹치는 그런 게 아니라 주로 여러 관계를 동시에 유지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어리고 예쁜 아내가 있는 사장님인데 자기보다 10살이 많은 여성과 거의 공개적인 불륜 관계를 맺은 채 살고 있다거나(주변 뿐 아니라 아예 집에서도 인정하는 분위기라 하더라), 직장 동료 남편이 해외 출장을 자주 나가는 직업인데 그때마다 자기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노골적으로 들이대서 곤란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심지어 유부녀 여럿을 거느리다시피 하는 직장 상사가 어느날 자기 사무실에서 쓰리썸을 하겠느냐고 제안해서 기겁하고 손사래를 쳤다는 얘기부터, 바람 피는 현장을 덮치고 보니 그 상대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촌 오빠였다는 소리까지도 들었다. 꼭 아는 사람을 통해 건너건너 듣지 않더라도 평일 오후 커피숍에 앉아있다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모여앉아 애인이 침대에서 어쨌네 하며 깔깔대는 소음에 시달리기도 한다(내가 남자라 이런 케이스들 위주로 들은 거지, 그 반대는 또 오죽하겠나 싶다).
확실히 이런 얘기도 역치값이 존재한다. 점점 자극이 강해지지 않으면 무뎌진다. 개인적으로 불륜에 대해서는 완벽한 가해자도, 완벽한 피해자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긴 하다. 이런 이야기가 혹시라도 배우자의 불륜으로 상처를 받으신 분께 또 다른 상처를 주게 되는 건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당연히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면야 바람 피운 당사자보다야 그 배우자 쪽에 설 거란 점은 분명하지만, 내가 완벽한 피해자는 아니라 말하는 건 애초에 혼인이나 연애란 관계가 본인이 그 상대를 선택해서 시작한 일이기 때문이다.
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교통사고의 책임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고장차를 몰고 도로에 나가면 문제가 있는 거니까 최대한 점검을 했어야 한다. 차 살 때 뿐 아니고 운행 중에도 시시때때로 점검은 필수다. 평소에 세차도 잘 하고 가끔 뜬금없이 타이어라도 걷어 차 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륜에 있어 가장 완벽한 피해자는 (있다는 전제 하에) 자녀들이 아닐까 싶다. 부부는 서로를 선택하지만 자녀는 부모를 선택한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난 아이의 유무에 따라 불륜 이야기에 꽤나 온도차를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 불륜 커플 중 한 쪽이라도 자녀가 있으면 일단 욕부터 나온다. 어디선가 "대체 애는 무슨 죄냐?"며 길길이 날뛰는 뚱뚱한 아저씨를 보신다면 그게 나일 수도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가 박해일에게 이렇게 묻는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맞는 말이다. 중단하게 될 리가 없다. 반대로 살다가 결혼한 사람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도 아예 없지 않다. 그러나 정말 매력적인 여성분이 다가왔는데(당연히 이럴 가능성 자체가 극히 희박하다), 그녀에게 아이가 있다면 난 적어도 99.9% 멈출 거라 확신한다. 우리의 사랑이 한 아이에게 상처를 줄 권리는 없다.
갑자기 이렇게 비장하게 말은 했다만 정작 난 연애는 커녕 누군가 때문에 심장이 멋대로 뛰어 본지가 손가락만으로는 헤아리기 모자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진짜 하도 오래 되어서 기억도 안난다). 연애세포가 퇴화되어서 흔적기관조차 사라져버린 것 같다. 가끔씩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듣는데, 난 대답 대신 손으로 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쭉 훑어 가리킨다. 대부분 그 정도 선에서 설명은 마무리 된다.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예의 때문인지. 자기가 착한 사람이란 이미지를 남기고 싶은 까닭인지 아니라고, 사귈 수 있다고, 어딘가에 헤비 씨를 좋아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는 상대가 여자라면 막바로 "그러는 당신은 나랑 사귀겠어요?"라 되묻는다. 그 순간 어쩔 줄 몰라하며 진심 미안해하는 상대를 보면 '이럴 거면 아까 멈추지 왜 상처를 더 주나' 싶다. 남자라면? 아까 설득이 끝나서 여기까지 넘어오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아니면 내가 헛소리 하지 말라며 면박을 주거나 이미 들은 척도 않고 딴 소리를 하고 있겠지.
난 인간관계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아서, 요즘 들어서는 주변에 내게 "왜 연애 안하느냐"고 물을 사람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는데, 친척분들 중엔 여전히 이런 의문을 갖고 계신 경우가 있다. 그분들이야 당연히 날 어릴적부터 봐오셔서 '우리 헤비가 조금 빠지긴 해도 그렇게 결정적으로 빠지진 않는데...'란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계신다. 그렇다고 친척분들께 예의를 안 차리고 팩트폭격을 할 상황은 아니어서(그 정도 사회성은 유지중이다), 그때마다 '나이를 먹다보니 주변에 이미 다 결혼을 해서 만날 사람이 없다'(실제로 사실이기도 하고)고 대답한다. 난 충분히 설명이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 정도로는 납득이 잘 안가시는 모양이다.
몇 년 전 사촌 동생 결혼식에서의 일이다. 자리가 많지 않았어서 난 식장 뒤쪽에 서 있었는데, 숙모님이 다가오셨다. 다른 친척분들도 좋으시지만 아버지의 바로 아랫동생이신 셋째 작은아버지와 셋째 숙모님이 진심 어릴 적부터 날 아껴주셨다(내가 조카들에게 나름 최선을 다하려 하는 것도 이분들께 받고 보고 배운 게 있어서다).
숙모님은 조심스레 다가오시더니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헤비야, 난 다 이해하니까 혹시라도 그런 쪽이면 몰래 말해줘도 돼."
적어도 10초 정도는 뜬금없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몰라서 멀뚱거리고 있다가 뒤늦게 의미를 깨닫고는 빵 터져서 한참 웃었다. 하도 소식이 안들리니 어느 순간 '혹시 얘가 말 못할 사정이 있나' 하셨나보다. 아무리 연애세포가 퇴화되었다고는 해도 공식적 취향에는 변화가 없으니 걱정 마시라는 말씀을 웃느라 드리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옆에 서 있던 사촌 여동생(이자 숙모님 큰 딸)에게 숙모님이 보시는 앞에서 친구소갤 부탁할 걸 그랬다 싶었다. 물론 그랬으면 열 살 어린 그 동생은 '저 오빠가 갑자기 뭘 잘못 (처)먹고 헛소릴 하나' 했겠지만, 적어도 숙모님은 안심(?)하셨을 테니까.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오자. 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맺는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신영복 선생이 겪은 일이다. 선생이 한 젊은 재소자가 침울해 있는 걸 보고 초면이지만 위로할 생각으로 말을 건다. 보통 감옥 안에서 선생이 보낸 햇수만 말해줘도 다들 적잖은 위로를 받곤 하니까.
고생이 많습니다. 누가 오셨어요?
...... 제 처가 왔어요 ......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었습니까?
...... 일 나가나 봐요. 말은 않지만......
그야 먹고 살자면 일 나가야지요.
그런 일이 아녜요.
......
가버릴 것 같아서 그래요.
재소자는 면회를 온 아내의 태도에서 그녀가 (다시) 몸을 팔러 갔을 거란 사실을 직감한다. 선생은 말한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를 그가 부정한 여자로 보지 않는 게, 설사 부정한 여자로 보더라도 그를 자신의 아내의 자리에 두길 꺼려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고. 선생은 천천히 생각을 열어나간다. "우리의 벽촌에는 의외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일부 반처, 일부 1/3처, 일부 1/10처도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일처 반부, 일처 1/3부, 일처 1/10부 라는 왜소하고 영락된 삶의 형식을 가까스로 꾸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에는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세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내를, 남편을 세들어 사는 삶도 있다..."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도 고뇌에 찬 그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 사무치는 생각은, 같은 시대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판이한 사고와 윤리관을 갖게 하는 건 무엇이며, 그것은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하는 몸서리입니다."
이 글로 불륜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다. 반대로 난 이 글 때문에 더 궁금해진다. 삶의 벽촌으로 몰려나가지 않은, 도리어 넉넉한 사회의 양달 중심 근처에 머물면서 충분히 온전한 하나를 누릴 수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왜 스스로 왜소하고 조각난 삶을 자처하는 걸까? 확신한다. 세상엔 다처와 다부란 말이 있지만 그건 말일 뿐 사실 스스로가 그만큼 쪼개지고 나눠지는 것일 뿐이다. 상대가 늘수록 더 외로워지고 빈곤해진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인정한다. 모든 상태와 모든 관계에서 마음이 부풀었다가 작아지고 사라질 수 있다. 때로 생기지 않아야 하는 마음에 갈팡질팡 할 때가 있다. 혼인이란 계약이 마음을 담보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마음처럼 마음대로 안되는 게 없다. 하지만 왜 어떤 이들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한 하나의 상태로 두지 못하는 걸까? 자신의 마음을 미리 던져 반쪽이 되고 삼분의 일이 되어야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 걸까? 왜 스스로 마음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 셋방살이를 선택하게 된 걸까? 무슨 까닭일까?
물론 안다. 반대로 그 사람들이 보기엔 십 년 넘게 독수공방에 걸핏하면 멍하니 텅 빈 천장이나 보고 사는 내가 더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그래 니 말대로 난 10으로 나눠 0.1이라 치자. 그런 넌 0이잖아." 그러면 할 말도 없고.
궁금해서 안좋은 머리라도 이리저리 굴려보지만, 사람 마음 일과 사람 사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이럴 때면 조금 뜬금없지만 여행스케치의 노래가 생각난다.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내 삶이든, 그들의 삶이든 진짜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그게 재미라면, 그래 재미겠지.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맞네, 그런 게 아니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