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을 되돌아보며 적는 소회 (3) - 레이스의 시작
그렇게 마냥 게임과 컴퓨터를 좋아하던 천방지축 초등학생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같이 축구하고 자전거 타며 놀던 친구들이 하나 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나 역시 영어학원은 그 당시 국룰이었던 만큼 다니고 있긴 했다. 하지만 다들 영어에 더해 추가적으로 수학학원에 다니는 모습은 생각보다 주변 상황에 민감한 나와 어머니의 입장에서 긴장감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미있게 다니던 태권도 학원(나름 품새 시범단이었다)과 축구클럽(나름 초등학교 대표팀 주전 중앙 수비수였다)을 그만두고 동네에서 제일 큰 수학학원을 다니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처음 학원에 갔을 때는 여느 친구들과 같이 바로 다음 학기 선행부터 천천히 시작했다. 그리고 돈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하긴 했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정확히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를 눈여겨보신 학원 담임 선생님은 이제야 다음 학년 선행을 시작하던 나를 콕 찍어 영재고 대비반에 들어가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사실 사교육 관련해서 별로 아는 게 없던 우리 모자는 그저 지금 높은 반으로 월반한다는 말에 혹해 승낙했다.
그때부턴 그저 레이스에 참가한 한 마리의 경주마와 같은 인생의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의 나와 어머니는 그 당시에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영재고 입시는 대학 입시만큼 경쟁이 치열한 판이고, 우리는 제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남들이 고3이 되어서야 시작할 격렬한 레이스에 참여했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책가방이라는 마구를 착용하고 선생님과 부모님이라는 기수의 채찍질을 맞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리는 일을 너무 일찍 시작해 버렸다.
운좋게도 영재고 대비반에 올라갔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저학년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온 친구들에 비해 선행의 시작이 압도적으로 늦었기에 초등학교 6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에 다른 아이들과 진도를 맞추기 위해 초6, 중1~3까지 총 4년 치의 진도를 한 번씩 훑었다. 아침 10시부터 어머니가 챙겨주신 도시락을 바리바리 싸들고 학원으로 등교해 법적으로 학원이 운영할 수 있던 가장 늦은 시간인 오후 10시까지 학원에서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 빼곤 모두 진도를 나가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그 스케줄을 어떻게 소화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땐 그저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 하나로 스스로를 밀어붙였던 것 같다. 만약 나보고 다시 돌아가서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또 다른 측면에서 되돌아보면 그때 그렇게 넉넉하지 않던 우리 집안 형편에서 내 교육 하나를 위해 먹을 것 입을 것 아끼시며 물심양면 지원해 주신 우리 부모님의 헌신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운 좋게도 학원이 수지구에서 가장 큰 학원이었기에 실적을 위해 최상위반 학생들에게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낮은 학원비를 책정해 주었던 것도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속된 말로 하자면 여러모로 아다리가 잘 맞았다. 하나라도 삐걱였다면 절대 불가능했던 초6부터의 생활이었다.
그렇게 대충 진도만 맞추고 시작한 영재고 대비반 생활. 올라가자마자 그동안 이를 위해 체계적으로 단계를 밟아온 친구들과의 압도적 격차에 나는 의욕을 잃었다. 처음 보는 수학올림피아드(KMO) 기출은 도저히 손도 댈 수 없는 난이도의 문제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친구들이 대충 문제를 쓰윽 보는 것만으로 척척 답을 써 내려가는 모습에 공부 좀 한다고 자부하던 초등학생 한상현의 자존감은 무너져 내렸다.
멘탈이 무너진 나는 그 비싼 학원비를 내면서 1년가량은 그저 숙제를 해가고 학원에 빠지지 않는데 급급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피 같은 돈이 줄줄 샌 느낌이라 너무 아깝고 부모님께 죄송하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반등의 계기는 중1 중반이 되자 찾아왔다.
변곡점은 너무나 싫었던 수학이 아니라 과학에 있었다. 중학생이 되며 수학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수업도 조금씩 추가되었는데, 처음 고등학교 과학을 접하며 그저 교과서만 달달 외우면 되던 중학교 과학과의 갭에 또 한 번 무너질 뻔했었다. 그래도 다행히 거기서 내 승부욕이 급작스레 불타올랐다. 수학이야 그동안의 차이가 있으니 그렇다 치고, 어차피 다 처음인 과학은 내가 쟤들보다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나마 화학, 생물, 지구과학은 좀 나았다. 하지만 수학을 잘 못하던 내가 수학과 큰 연관성을 갖는 물리를 잘할 턱이 없었다. 그래서 과학 선생님들은 그나마 학원 내 평가에서 성적이 잘 나오던 편인 화학으로 올림피아드를 준비하자 말씀하셨다. 하지만 뭐에 씌었는지 독기만 가득 찬 나는 물리를 선택했다. 이것도 못하면 나는 그냥 공부를 할 팔자가 아니라는 얼토당토않은 각오와 함께였다. 어떻게 보면 멍청한 똥고집이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이때 이 선택 덕에 나는 공부하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가 내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계획을 세워 공부를 했던 첫 번째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시험공부는 그저 전과를 읽고, 문제집 한두 번 풀어본 후, 틀린 문제만 다시 체크하고 또 다른 문제집을 풀고, 체크하고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물리에는 그 간단한 방법이 통하지 않았기에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야만 했다. 짧은 고민 끝에 어차피 아는 것도 없는데 시간이라도 박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하이탑의 모든 내용을 노트에 필사하며 정리하고,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따로 빼서 또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제를 풀기만 하는 게 아니라 틀린 문제의 오답노트를 쓰고, 이해가 안 가는 문제는 이해가 될 때까지 풀어보고, 정 이해가 안 되면 외우며 나만의 방식을 찾아나갔다. 그렇게 점점 경험이 쌓이자 무작정 시간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공부에 나름의 체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그 방식이 잘 맞아떨어진 덕에 10점도 못 맞을 것만 같던 물리올림피아드에서 아쉽게 한 문제 차이로 입상을 놓치는 수준까지 실력을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던 것 같다. 아, 하면 되는구나! 를 외치며 놓았던 수학도 다시 손에 잡았다. 중1 KMO에서 충격적인 0점을 받고 포기 상태에 있었지만 다시 개념부터 정리하고, 오답노트를 만들다 보니 점점 문제가 눈에 들어오고, 풀이를 위한 논리가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점점 실력을 쌓다 보니 자연히 원내 정기평가에서도 좋은 성적을 얻었고, 중2로 넘어가며 초6 때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괴물들이 득실득실한 영재고 대비반 3개 중 가장 높은 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웃긴 건 내가 이때까지 영재고라는 게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 과학고, 영재고 이런 게 있고, 좋다더라 하는 정도만 알았지 이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환경이 제공되는지 등등 아는 게 없었다. 영재고의 의미와 장점에 대해 알게 된 건 우습게도 영재고 대비를 시작한 지 만으로 2년이 넘게 지난 후였다. 돌이켜보면 정말 대책이 없었던 것 같다. 뭔지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했나 싶다.
그 당시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서울대에 가야지! 라고만 생각하던 어린 나는 영재고의 서울대 합격률을 처음 알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거진 절반이 서울대에 합격한다). 산술적으로 따져보기만 해도 일반고에서 가는 것보다는 당연히 절반 가까이가 서울대에 가는 영재고가 서울대 진학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처음 들었고, 그때부터는 시간을 갈아 넣는데 조금 더 거침이 없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였지만 다행히 같이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이 참 좋은 친구들이어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고, 학교 친구들도 재밌고 유쾌한 친구들이 많아 생활이 항상 즐거웠던 것 같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매일매일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공부만 했던 것은 헛되지 않았고, 나는 무사히 영재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여기에 또 에피소드가 있는 게, 원래 영재고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잡았던 목표는 집에서 가까웠던 수원의 경기과학고였다. 실제로 영재고 입학시험 결과 경기영재고 2차 시험까지 합격하고 3차 시험인 캠프만을 남겨두었었다. 그런데 웬걸, 그 해 처음으로 과학고에서 영재고로 전환된 대전과학고에 덜컥 우선선발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사실 2차 시험 날짜가 안 겹쳐서 그냥 최악의 상황 대비용으로 넣었던 학교였는데 3차 시험도 칠 필요 없는 우선선발이 될 줄이야.
행복한 고민이었다. 원래 가고 싶었던 경기과고를 갈 것이냐, 1기여서 불안하지만 어쨌든 안전하게 진학 가능한 대전과고를 갈 것이냐. 끝까지 정하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에 같은 상황에 놓인 학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얘는 어렸을 때도 화학, 지구과학 빼곤 나보다 다 잘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 연대 의대를 가서 여기서도 성적 잘 받고 졸업했다)
나 : 야 너 경기/대전중에 어디로 갈 거냐? 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친구 : 응? 당연히 대전 가야지. 우발(우선선발)이잖아? 나 이미 입학비 대전에만 넣었는데?
나 : 아 그래? 그럼 그냥 나도 대전 가야겠다! 에이 몰라~~ 같이 가자고~
그렇게 우당당탕 대전과학고로의 입학을 결정했다. 여담으로 한 번도 학교를 가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입학을 결정했던 것이었는데, 경기과고의 깔끔한 인조잔디 운동장을 보고 한껏 기대를 했던 내 앞에 나타난 대전과고의 관리 안 된 정사각형 형태의 천연잔디 운동장은 절망감을 안겼었다. 정사각형의 대각선 방향으로 놓인 골대를 보고 어이를 상실했던 우선선발 소집일의 심정이 아직도 떠오른다. 진짜 진지하게 지금 차 돌려서 수원 가면 경기과고 캠프에 참여할 수 있는지 계산했었다. 그때 대전으로 가자고 했던 친구가 옆에서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어쨌든 돌아갈 시간은 없었기에 그대로 나는 대전과학고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