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세계의 끝 / 아홉소 X 첨
“그럼, 생일선물로 맥MAC 사주세요.”
“맥? 야...오라버니 형편 뻔히 알면서. 맥북MacBook은 너무하지 않아? 설마 햄버거 사달라는 건 아닐 것이고.”
지칭하는 대상이 달라서 대화에 혼동이 생겨버렸다.
나한테 “맥”이라고 하면 맥도널드 햄버거를 말하거나, 애플사에서 나온 맥북이거나, 아니면 아무리 멀리 나가도 한 시대를 풍미한 소형 기관단총 MAC-10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들 중에 어떤 것일까 고민하다가 햄버거는 아닐 것 같고, 기관단총은 더더욱 아닐 것 같아 맥북으로 찍어서 답했던 것이다.
“아니요. 화장품 말이에요. 화장품. MAC 립스틱 사주시면 되겠다.”
아. 화장품 브랜드를 말하는 것이었구나.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다(그때는 립스틱이 그렇게 비싼지 몰랐지.). 그리고 얼마 뒤에 그 친구를 대동하고 백화점 1층 매장에 가서 본인이 고른 색의(붉은색 계열의 립스틱이 굉장히 많았는데 모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립스틱을 사서 포장해 주었다.
그날도 그랬지만, 가끔씩 백화점 일층을 지나갈 때면 간간히 떠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저 형형색색의 여성용 화장품들은 어느 회사에선가 만들고 있겠지. 나는 정확한 이름 하나 변변히 기억 못 하는 회사들이지만, 분명히 그 회사에는 남성들도 근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남성”들은 어떤 기분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을까? 그들은 자기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물품에 어떤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그 애정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본인은 평생 가봐야 쓸 일도 없는 물건에 대한 애정 말이다(편견인가?).
이쯤 되면, 연달아 옛날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클리쉐들이 떠오르곤 한다. 여성용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남자 직원이 자기 회사 제품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면서 회사에서 만드는 모든 화장품들을 모아다 발라보거나, 여성용 속옷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남자 직원이 여성용 속옷을 입어보거나 하는 장면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왓 위민 완트 What Women Want>에서 멜 깁슨이 여성용 속옷을 입고 가터벨트를 차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그런 장면이 있었던가?) 그러면 꼭 아는 여자가 나타나 “변태!” 하고 외치지. 아니면 “그런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라고 짐짓 이해심이 많은 표정을 짓지. 보통은 이쯤에서 쓴웃음을 지며 생각을 멈추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생각이 조금 더 나갔다. 단지 월급이 매달 꼬박꼬박 나오니까 다니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서 만드는 물건에 조금의 애정이 없이 그 회사에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애정이 있는 것이겠지.
아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물품이나 서비스에 애정은 고사하고 오만가지 환멸을 느낀다고 해도 먹고살기 위해 다녀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콜센터에 근무하는 분들과 가끔 식사를 하면서 얘기해 보면 몇 분은 확실히 회사나 업무에 애정이 있어서 다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경우는 제쳐두고.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아마 나는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준다고 하여도 여성용 화장품 회사에 다니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쓸 일도 없고 관심도 없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에는 말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지금보다 생활이 더 곤궁해 지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