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세계의 끝 / 아홉소 X 첨
“아, 심심하다.”
정말로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였다. 물론 그 한가로움은 모든 할 일들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루고 보는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점심 먹고 느지막이 집을 나와 카페에 앉아 어울리지도 않는(진심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놔두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아. 형님. 또 왜 그러십니까?”
앞에 앉은 동생이 시큰둥하게 읽던 책을 내려놓고 물어왔다.
“그렇게 대놓고 심심하다고 하시면, 앞에 있는 사람은 뭘 어떻게 해야 하죠?”
“아니, 동생이랑 있어서 심심하다는 건 아니고.”
“왜요, 요즘 회사 일이 재미없으십니까, 형님?”
형님, 형님 하니까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잠깐 설명해야겠다.
앞에 앉은 친구의 성별은 엄연히 여성이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원에서 알게 된 친구인데, 처음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랬다. 딱히 그렇게 불리는데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고.
털털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자로 오해받을 사람은 아니다. 만약 나처럼 대충 보지 않고 객관적으로 꼼꼼히 본다면, 키도 크고 팔다리도 길쭉길쭉하고 얼굴도 조막만 한 데다가 이목구비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미인이라고 불릴만한 축에 속할 것 같다. 다만 내가 형님, 형님하고 불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남동생처럼 대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친구랑 같이 밥 먹을 때는 아무 거리낌 없이 트림하고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는 게 그 증거렸다.
가끔 남자 친구도 데리고 와서 둘이 함께 형님! 형님! 하고 부르면 내가 갑자기 조폭 두목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고는 한다.
전반적으로는 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동생, 가끔 아주 예리할 때가 있다. 아니면 내가 속생각이 너무 잘 드러나는 타입인가. 지금 같은 경우가 바로 그 예리함을 느끼는 때다. 그렇다. 내가 심심하다고 한 말은 바로 그 의미였다. 최근에, 아주 최근에, 나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물건에 더 이상 아무런 애정과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회사는 그대로인데(너무 그대로인데) 내가 변한 것이겠지. 그러다 보니 일은 급격히 줄어들고(그동안 너무 나서서 일했나.) 회사에 있는 시간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게 되었다. 또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해도 좋다. 사실이 그런 걸. 갑자기 인생이 헛헛해졌다. 그럴 수밖에.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생활이 헛헛해지니 덩달아 인생이 헛헛해질 수밖에.
“그런 것 같아. 어쩌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앞에 앉은 친구의 입장에서도 딱히 해줄 말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회사일이 재미없어. 회사 가기 싫어. 세상에 제일 흔한 푸념 중에 하나 아니겠는가 말이다. 너무나 흔해서 굳이 대답해야 할 필요성도 못 느꼈었을 수도 있다.
“어쩌지?”
“어쩌시게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다니, 어지간히도 성의가 없군. 형님의 인생에 큰 위기에 닥쳐온 것 같은데.
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동생의 눈은 어느새 읽던 책으로 돌아가 있었고,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해결책을 찾는 게 아니라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 옆의 옆 테이블에 앉은 커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그건 오빠가 오해 살 행동을 한 거지!
(역시 한국사람은 말할 때 “아니”로 시작하는 문장을 많이 쓰는구나...)
“아니, 그게 어떻게 내 잘못이야. 나는 가만있었을 뿐이지.”
(얼씨구! 혹시 이다음에도?)
“아니, 그러니까 왜 가만히 있냐고!”
(빙고!)
옆의 옆 테이블의 대화가 점점 더 뜨거워져 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 테이블에는 고요가 계속해서 깃들어 있었다. 동생은 앞에 앉은 사람이 살아있기는 한가 살피듯 간간히 눈을 치켜떠서 확인하고는 이내 책으로 돌아갔고, 나는 핸드폰만 만지작만지작 하고 있었다.
그러다 토요일 오후의 고요함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별생각 없이 말을 툭 내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