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세계의 끝 /아홉소X 첨
“동생. 나 아무래도 예술을 해야 할까 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뜬금없는 출사표였다. 아마 핸드폰에서 읽던 신문기사에서 예술이 어쩌고 저쩌고 쓰여 있었나 보다. 마침 카페에는 90년대 초입쯤으로 짐작되는, 지금에는 육아 예능에나 간간히 고개를 디밀 법한 흘러간 아이돌들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음악과 상황, 던져놓은 말의 내용을 종합해 보니 60년대 한국영화 초창기에 스크린에 흩뿌려졌을 법한 상황이 매우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때 동생이 뭔 허튼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쳐다보고 빨리 책으로 돌아갔으면 그럭저럭 무사히 어색한 상황이 정리되고 지나갔을 것인데, 어찌 된 일인지 동생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말을 이어 왔다. 아마 책이 좀 지겨워졌거나 했었겠지.
“얼마 전에는 외국어 공부에 전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다. 그리고 열심히 했었다. 그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가 더 나빠지기 전에는. 하지만 그걸 그만둔 핑계로 대기에는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뭘 하고 싶으신데요?”
형님 체면에 두 번 계속해서 대답을 못 해서는 큰 낭패다.
머리가 그날 일어난 후로 가장 빨리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던진 말이라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을 리도 없다. 그래서 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뭘 할 수 있는지, 정확히는 뭘 당장 시작할 수 있는지 찾았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영화를 만들어? 당장에 실현 가능성이 너무 없다. 노래를 불러? 세상 음치가. 그림을 그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첨인가. 이것저것 제하며 탐색하다가 글을 쓰는 것에 이르렀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적인 글은 아니지만 평생 써온 것이 글 아닌가. 옳거니. 던져보자.
“그... 글을 써볼까 해!”
“흐음... 글입니까?”
즉흥적으로 엄한 소리를 던져놓고 동생의 안색을 구차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 동생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저번에 외국어 공부를 시작해 보겠다고 선언했을 때보다는.
“그, 그렇지! 글을 써볼까 해!”
“글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어... 그렇지. 여러 종류가 있지. 흠. 소설이 어떨까?”
“소설이요...”
동생이 엄지와 검지로 양볼을 잡고 입을 삐죽이기 시작했다. 익히 봐온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때 나오는 모습이다. 가끔 눈이 초점을 잃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생각에 잠겨있는 경우가 반, 진짜 아무 생각 없는 경우가 반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형님한테 글 쓰는 제주가 있었던가?’ 하고 반추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오래 놔두면 분명히 부정적인 결론을 낼 가능성이 높아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니 회의시간에 배운 기술이 있다. 상대방이 내 계획에 대해서 오래 검토하게 놔두면 안 된다. 오히려 내 제안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계획을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마침 동생이 그림에 프로급 수준이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대학원에 함께 다닐 때에도 교수가 조금만 지루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동생 앞에 펼쳐져있던 교재가 갑자기 화폭으로 바뀌는 것을 몇 번이나 목도했었다. 그리고 페이지 페이지 사이에서 온갖 꽃들과 나무,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생물들이 튀어 올라왔었다. 이거다.
“그래. 내가 글을 쓸 테니, 동생은 거기에 맞는 삽화를 그려줘.”
맙소사. 삽화라니. 말을 던져놓고는 아차 싶었다. 요즘에도 글에 삽화가 들어가던가? 삽화가 들어간 책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지? 초등학교 때였나? 어린이용 셜록홈스 시리즈에 들어가 있던 그림들이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도 삽화라고 부르고 있긴 한 건가?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