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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슈슈 Jun 21. 2024

햇병아리 간호사의 암병동 적응기

“띵동 띵동, 510호 CPR”, “띵동 띵동, 510호 CPR”

“잠깐만? 510호 내 환자잖아?!!”

구내식당에서 밥을 그야말로 입에 쑤셔 넣고 있었는데 말이다.

5분이면 후루룩 마시고 가는 건데,

이번 주에 처음으로 점심 먹는 건데,

‘오늘은 조용하네요?’라고 부정 타는 말을 뱉은 한 시간 전의 나를 저주한다.

CPR 알람 소리에 식판을 던져두고 미친 듯이 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환자의 진단명과 오전에 있었던 검사결과, 회진 때 했던 담당의의 말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숨이 가빠 헐떡이며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510호 앞에는 달려온 인턴, 레지던트, 옆 병동 간호사들까지 합세하여 난리통이다. 침대시트까지 피범벅이 되어 흉부압박으로 들썩이는 환자의 가슴, 폴대에 주렁주렁 달린 수액들과 약물들 사이로 보이는 환자의 창백한 얼굴. 복도에서는 보호자인 할머니가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며 주저앉아 목놓아 울고 있다. “아이고아이고 영감...”  

‘....?’

‘아우씨.. 꿈이네?? 제대한 한국 남성들은 한 번씩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는데 이건 길몽이야 흉몽이야?’ 퇴사 후에도 한동안 꿈속에서 퇴근하지 못하는 꿈을 꿨다.   

  

 현재의 나는 20대 초반의 나를 ‘전쟁터에 출정하는 군인’이라 일컫는다. 앳된 나이었지만 일이 일인 만큼 정말 비장했고 매 순간 긴장했으며 쓸데없이 성실했다. 나이가 들며 지금은 직업인으로의 나와 실제 나의 자아를 분리할 수 있지만 그때는 분리가 안되던 시기였다. 간호사로서 내가 흔들리면 일상이 지진이 난 듯 흔들렸다. 근무 중에 실수를 해서 누군가가 “너 진짜 큰일 날 뻔했어”라고 하면 내가 정말 살인미수라도 한 것처럼 죄의식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간호학을 공부하며 운이 좋게도 꿈꿨던 병원에 입사했지만 운이 나쁘게 하필 폐암센터에 배정되었다. 폐암센터는 업무 강도가 높아 퇴사율 높기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신규 간호사의 무덤으로 출정하는 내 맘은 심란했다. 폐암은 질병의 중증도가 높고 전이도 빠른 편이라 일반 병동임에도 중증도가 거의 서브 중환자실 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EBS ‘극한 직업’ 프로그램이 일주일간 내가 근무하던 병동에서 촬영해 방영하기도 했다. ‘암병동 24시’의 타이틀로 방영될 정도였으니 나는 오피셜 한 극한 직업인이었다. 병원에서 수시로 울리는 CPR 방송에서 가장 많이 외쳐 되는 장소도 바로 폐암센터였다. 그러다 보니 작은 실수에도 서로 눈에 불을 켜고 서로를 찔러 될 수밖에 없었다.     


 병원 입사 후 약 한 달간의 트레이닝 기간이 주어졌는데 이 기간이 지나면 공포의 ‘독립’이 기다리고 있다. 온종일 혼자 열두 명이 넘는 중환자를 케어해야 하는 ‘독립’이라는 중압감은 상상이상의 공포였다. 급하면 도와줄 동료들은 있었지만 내 담당 환자들에 대한 책임은 결국 나의 몫이기에 햇병아리였던 나는 하루하루 다가오던 독립일을 생각하면 손발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당시에는 출근에 대한 공포로 병원 앞 육교를 건너며 ‘육교가 무너져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무서운 생각을 자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동기들 대부분이 그 육교 위에서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하니 독립이 주는 공포와 우울감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선배들에게 하나를 물으면 일단 혼나며 세 가지의 질문이 돌아온다. “공부도 안 하고 물어보는 거야? 내일까지 이거 이거 알아와”라는 말에 퇴근 후에도 졸린 눈을 부여잡고 공부를 해야 했다. 수도 없는 항암제의 작용과 부작용, 적응증, 검사명, 결과들의 정상수치와 해석, 약물의 작용과 부작용, 온갖 기계들의 세팅 방법과 카운트, 밑도 끝도 없는 의학용어들과 그 용어들을 또 줄여서 만든 용어들 등등등. 서면으로 봐도 막막하지만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오더는 환자 상태가 파악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고 치지 않으려면 정신력을 총동원해 그야말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했다. 병동에서 시술이나 처치라도 하게 되면 각기 다른 물품들을 빠르게 준비하여 순서에 맞게 척척 전달해야 하는데 시술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노트에 필요한 물건들과 그림으로 그려놓고 급할 때마다 커닝하며 일을 했다. 말하자면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니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병원이라는 전쟁터에서 빠르게 녹아들기 위한 무기가 있었다면 여초집단에서 선배들에게 예쁨 받기 위한 사회적 눈치였다. 다년간의 여중-여고-간호학과를 경험하며 여초 테크를 탔던 나는 살아남기 비법을 나름대로 체화하고 있었다. 직장 생활에 있어서는 예의 바르고 성실한 안동출신 유교걸이 아니었던가. 나는 주로 ‘죄송합니다’와 ‘죄송하지만’을 입에 달고 살며 이 상황을 부모님께서 아신다면 너무도 죄송할 저자세의 나날들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내가 힘들다고 부모님께 울면서 전화를 하면 돌아오는 답변들은 “직장 생활은 원래 힘든 거다”, “그만두고 내려오면 문 안 열어준다” “그것도 못 견디면 힘든 인생사 어떻게 사나” 등의 철벽 멘트였다. 나를 ‘돌아갈 곳 없는 딸내미’로 포지셔닝해 주신 부모님 덕에 퇴사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적응해 갔다.    

 업무 독립 후 한 달 만에 약 50%의 비율로 동기들이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그들은 대부분 퇴사하여 좀 더 작은 규모의 병원으로 가거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처음엔 그들이 패잔병인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 퇴사자들을 만나보면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정일 뿐, 나는 다시 폐암병동으로 돌아가 일상을 버텨내야 했다.     

 

 독립의 날은 빠르게 찾아왔다. 당시 소원이 출근한 지 열두 시간 안에 퇴근하기였을 정도로 상황은 혹독했다. 퇴근하려면 갑자기 환자 상태가 나빠져서 중환자실에 가거나 응급상황이 발생하는 일이 하루 걸러 발생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환타’(환자 타는 사람의 줄임말-출근하면 환자들이 갑자기 아프고 일 몰리는 사람)라는 것을 알게 됐다. 100kg이 넘는 환자가 섬망 증세로 나에게 발차기를 해 맷집수련을 한 적도 있고 근무 중 환자가 갑자기 병원 옥상에서 투신하는 정신적으로 괴로웠던 사건도 발생했다. 어둠이 내린 새벽, 불빛 하나 없는 화단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피투성이로 으깨진 환자의 가슴을 눌러댔다. 한 번은 환자가 중환자실로 내려가야 하는 응급상황인데 흥분한 보호자가 의사에게 주먹을 날려 환자는 중환자실로 보호자는 경찰서로 연행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병문안 온 친척들은 병세가 깊어진 환자를 보고 “입원할 때는 환자가 걸어 들어왔는데 왜 상태가 이러냐!”며 따지는 과정에서 멱살이 잡히고 신발이 날아왔다.  

 당시에는 왜 내가 이런 일들까지 겪어야 하나 괴로워하며 ‘내가 만약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 나이에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내가 겪은 일들은 모두 생과 사의 연장선 위에서 일어날법한 이야기들 중 하나인 것 같다. 죽음이라는 관문 앞에서 인간의 날것인 본성 자체가 튀어나오던 상황들. 다만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날아오는 공격들을 방어하지 못해 그대로 맨몸으로 버티고 있을 때가 많았다.  


 고단해 보이는 첫 직장 적응기지만 나는 내가 아는 것의 많은 것을 병원에서 배웠다.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희망을 보았고 사랑도 보았다. 서툴렀지만 내 손길에 진심으로 감사해하던 분들이 있었고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픈 이를 보면 진심으로 돕고 싶은 측은지심이 생겨 은퇴 후에 개발도상국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이제는 퇴사한 지 10년이 넘어 기억이 미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퇴사하던 그날의 기억이 선하다. 내가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던 시기에, 나는 충분히 1인분이 아닌 2인분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퇴사했다. 매 순간 진심이었던 전쟁 같던 병원생활을 잘 견뎌준 내 20대에 감사하다. 고마워, 과거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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