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옆에 있을 줄 알고 제일 함부로 대했던 사람. 결코 만만치 않았음에도 제일 만만했던 사람. 믿고 의지하며 무거운 짐을 기꺼이 나누어졌던 가장 소중한 사람. 어지간히도 많이 붙어 다녔던, 어지간히도 자주 부딪쳤던 나에게 딱 맞는 최고의 배필.
그러나 한순간 걷혀 버리는 허무한 아침 안개처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여름 바람처럼 훌쩍 스쳐 지나가 버린 옆자리.
함께했던 시간의 백분의 일, 일 퍼센트에 해당되는 반년 동안 제일 견디기 힘든 아픔은 상실감이었다. 나를 덮쳐 오는 시커먼 어둠 속의 깊은 상실감.
왜 다시 보지 못하는 것일까? 늘 함께였던 이 자리가 왜 이리 황당하게 텅 비어 버린 걸까?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다시 만날 수는 있는 걸까? 만나면 서로 어떤 마음일까?
하지만 이 세상의 육체를 지닌 존재로서는 다시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다시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터무니없이 깊고 아픈 상실감. 떠나간 사람의 배우자로서 오롯이 혼자 짊어져야 할 아픔이었다.
고마운 많은 사람들이 손 내밀어 주고 시간과 마음을 내어 주었다. 그중의 한 분이 브런치 구독자 빅토리아 님이시다.
내 쏟아지는 슬픔의 글들에 댓글로 다가와 귀한 정보를 주셨다. 사별자 치유 프로그램에 대한 자상한 소개와 안내와 격려 덕분에 그 프로그램의 수혜자가 되었다.
2023년 10월 5일부터 11월 23일까지 8회 차로 이어진 사별자 치유 모임. 사랑마루 4기.
장소는 용산성당. 시간은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 5시. 참가 인원 다섯 명. 다섯 사람 모두 최근 일이 년 사이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내었고 60대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첫 모임이 있는 날, 등기 우편으로 보내온 안내장에 자상하게 적혀 있는 대로 낯선 길을 따라 처음 가보는 용산 성당에 도착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성당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초면의 봉사자분이 활짝 웃음을 띠고 반갑게 다가왔다. 앙증맞게 작고 붉은 꽃망울을 맺고 있는 예쁜 장미꽃 화분 바구니를 건네주었다. 본당 제대 앞, 예쁘게 꾸며 놓은 자리에 놓여 있는 남편의 명패와 그 자리를 밝히고 있는 촛불 앞에 그 꽃을 봉헌하라고 일러 주었다. 꽃바구니를 건네받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래, 남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났는지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채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치유 프로그램 첫 순서인 위령 미사 봉헌이 끝났다. 참여 인원은 30여 명. 봉사자들과 신부님, 수녀님, 앞서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간 선배들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아래층 교리실에서 준비되어 있는 차와 과일과 간식을 들며 참석자들과 우리 다섯 사별자는 간담을 나누었다. 공감과 격려와 위로의 자리였다.
전해받은 프린트물에 오늘 모임의 주제가 적혀 있었다.
'하느님께서 큰일을 하실 것이다.'
의미심장한 주제였다. 상실감과 그리움과 슬픔의 안갯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사별자들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배워 그분의 도움으로 이 어려움을 힘껏 극복하자는 위로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옆에서 함께 하겠다는 수도자와 봉사자, 선배들의 격려가 전해졌다.
다시 장소를 바꿔 나눔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 지켜야 할 약속을 함께 봉독했다.
1. 내가 겪은 상실과 그 상실이 가져다준 슬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슬픔에 대해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말하겠습니다.
2. 서로가 정직하게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각자가 겪은 고유한 상실과 슬픔을 나의 것과 비교하지 않겠습니다.
3. 우리는 상실의 고통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함께 표현하고 지지받기 위해 온 것입니다. 충고하거나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4. 이곳은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주고 실컷 울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는 곳입니다. 겸손하게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며 눈물이 많아지고 자주 울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내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할 것입니다.
5. 허무감, 죄책감, 분노, 고독, 무력감, 좌절 등의 고통이 한꺼번에 복받쳐 오거나 지속된다 하더라도 불안해하지 않고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내 고통이 경감된다는 것을 믿고 꾸준히 나아가겠습니다.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꾸준히 내 삶의 나무에 물을 주겠습니다.
6. 우리가 이야기하고 들으며 나눈 우리의 상실과 고통의 경험에 대해 세상 끝날까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