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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Feb 28. 2024

새로운 인연

  후속모임

 2024년 2월 15일. 12시. 4호선 이촌역 2번 출구. 추적추적 겨울비 내리는 스산한 날씨.

 네 명의 낯익은 얼굴들이 반가워하며 자연스레 서로를 품에 안았다. 등을 토닥였다. 후속 모임 세 번째 날이다.


 사별자 치유 프로그램이 끝나갈 무렵 봉사자들은 자연스레 우리들과 거리를 두며 우리들끼리 계속 관계를 이어가는 후속 모임 갖기를 권유했다. 자조그룹을 마련하여 새로운 지지망을 가진다는 취지였다.

 제일 연장자인 내가 자연스레 총무역을 맡게 되었다. 다섯 중 한 명은 첫 모임 이후 혼자 그 길을 걷겠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12월, 1월, 이미 두 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1회는 서래마을 가자미조림집, 2회는 우리 집, 3회째인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함께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박물관 입구로 들어섰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해 있다. 조그만 눈비알맹이들이 세찬 바람에 실려 우산 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오늘 우리 목적지는 2층에 있는 '사유의 방'이다. 세계 박물관 6위에 꼽힌다는 명성에 걸맞게 넓은 공간에 격조 있게 전시되어 있는 우아한 자태의 각종 유물들에게 먼저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 1층 복도 정면에 우뚝 서서 높은 천장을 향해 솟아 있는 경천사 삼층석탑도 무척 인상적이다. 2년 간 상설 전시한다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진품 유물들을 비롯해 적어도 열흘은 시간을 가지고 차분히 감상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수많은 전시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심장하게 와닿을 귀한 유물들을 처삼촌 뫼에 벌초하듯 건성으로 훑으며 지나갔다.


 2층에 자리 잡은 '사유의 방'. 6,7세기 삼국시대에 제작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두 점이 전시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한번 둘러볼 것을 추천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ㅡ주제는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깊은 고뇌와 깨달음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며 모든 것은 생각과 함께 시작된다는 사유의 탄생을 읽을 수 있다.ㅡ

 블로그에서 찾아 읽은 해설이다.


 입구에 들어서서 본 전시장으로 꺾어 들기 직전 약 10m 정도의 복도.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컴컴한 조명 아래 복도 한쪽 벽을 가득 우고 있는 디지털 영상. 세계 제1위라는 디지털 영상 선진국답게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그 영상이 마음을 훅 끌어당겼다. 2,3미터 거리를 둔 반대편 벽에 등을 붙인 채 잠시 그 앞에 머물렀다.


 검푸른 물결로 거대하게 다가왔다 금세 허무한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형체.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장엄한 생성과 미약한 소멸의 끝없는 반복.


 망망대해 끝을 알 수 없는 밤바다의 출렁임일까? 거대한 공간을 거침없이 휘감도는 우주의 기운일까? 사람의 마음을 쉴 새 없이 뒤흔드 희로애락, 감정의 파동일까?


 아, 이승을 떠나 저승을 향할 때 인간의 혼이 지나는 정화의 길이구나. 저 엄정한 공간을 홀로 통과하려면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외로울까? 왈칵 뜨거운 마음이 되었다.

 절대자의 가없는 자비 없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사랑 어린 기도 없이는 너무나도 고독하고 힘든 길일 것 같았다. 휘청이며 넘어지고 말 것 같았다.

 먼저 떠나간 자들이 지나갔고 뒤를 따라가는 우리들이 거쳐 가야 할 여정, 그것은 영구하고 장엄했다. 그 위대한 여정이 연약한 우리 모두에게 편안하고 아늑하게 매듭지어지기를 기원했다.


 가즈오 이시구로 <파묻힌 거인>,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서로를 끔찍이 아끼며 사랑하는 노부부, 남편 엑셀과 아내 비어트리스.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겪어내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들은 아들이 이미 먼저 가 있는 저 죽음 너머의 세계, 저승을 향해 둘이 함께 노 저어 가고 싶었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그것을 완곡히 저지한다. 이 배는 자신이 노를 저어야 하며 한 사람밖에 더 탈 수 없다고.

 남편은 저항한다.

 "아내와 내가 따로 떨어져 섬으로 건너가는 일은 없을 거요."

 사공은 딱 자른다.

 "부인을 먼저 데려다 놓고 서둘러 당신을 데리러 올 테니 바닷가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럴 수 없으니 지금 우리들을 함께 데려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남편.

 먼저 배에 올라 채 한 줌도 안 될 것처럼 몸을 구부리고 누워있는 노쇠하고 병약한 아내와의 마지막 대화가 허용된다.

 "육지로 올라가 그를 기다려요. 그가 곧 당신을 데리러 갈 거예요."

 "정말로 우리가 지금 따로따로 가자고 이야기하는 거요?"

 "잠깐 그런 것뿐이에요."

 "좋아요 당신 말대로 하지요.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왜 아직 안 떠나는 거예요?"

 "하지만 당신을 한 번만 더 안을 수 있게 해 줘요."

 최후의 짧은 포옹. 최후의 짧은 만남.

 "그럼 잘 가요."

 "잘 가요, 내 하나의 진정한 사랑."

 육지 쪽 작은 만에 지고 있는 석양만을 바라보던 남편은 사공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물속을 헤치고 가며 뒤돌아보지 않는다. 계속 물속을 헤치며 간다.


 '사유의 방'을 나와 박물관내 식당으로 향했다. 넓은 통유리 창문 밖으로 그  제법 굵어진 하얀 눈들이 강한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럽게 휘날렸다. 발 빠른 윤무로 창문 가득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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