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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r 27. 2024

2024년 3월 15일 금요일

  혼자서 부산으로

 새벽녘, 옅은 잠에 설핏 꿈을 꾸었다. 거실 저쪽 편에서 유치원생 정도의 남자아이가 달려오더니 와락 내 품에 안긴다. 나는 반갑게 안아 주며 내가 잘하는 거꾸로 들기를 해 주었지만 팔힘이 약해 아이가 살짝 바닥에 얼굴을 짓찧었다. 너무 미안해서 얼른 안아 일으키며 다음에는 다시 더 잘해 주겠다고 어르고 달랬다. 바로 그 뒤에서 아들로 생각되는 초등 저학년 남자아이가 주산 학원비를 달라고 했다. 얼마냐고 했더니 22,000원이라고 한다. 2만 원 아니냐고 했더니 남으면 선생님이 돌려주실 거란다.

 내가 말했다.

 "기다려 봐, 어쩌면 아빠가 자동 이체로 내주고 계실지도 몰라."

 꿈속에서 남편은 어딘가에 살아 있었고 옆에 있지는 않았다.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남편, 그렇지. 매번 정기적으로 지출되는 적지 않은 금액들이 남편 통장에서 자동이체되고 있었지.

 재산세, 관리비, 의료보험료, 자동차 보험료, 핸드폰 요금, 인터넷 요금ᆢᆢ.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내 통장에서 결제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부담이 꿈속에서 2000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다.

 긴 세월 모든 의무를 다 끝내고 자신을 위한 지출에만 부채를 남긴 채 먼 길 떠난 남편. 근검 절제로 현재의 안정된 여건을 마련해 놓았다. 변함없는 신의와 성실로 집안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남편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많은 부분 남편에게 의지하고 기대 왔던 긴 시간들. 교통편이나 지리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출발 직전까지 소소한 집안 살림 챙기기에 급급하여 남편의 뒤꽁무니 따라다니기에 바빴던 여정들. 이제 혼자가 되어 모든 길고 짧은 나들이에 정신 바짝 차리고 교통편이나 일정을 잘 챙겨야 했다. 계획하고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여정을 하나하나 내 힘으로 다 해내어야 한다.


 이번 부산행도 그러했다.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핸드폰 앱을 이용해 기차표를 예매했다. 수서역에서 출발하는 srt 기차.

 역 광장에 들어서면 정면에 대합실이 보이고 눈앞에 있는 개찰구로 들어가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는 기차를 탔던 기억들. 이젠 아득한 옛날이야기이다. 

 하나뿐이었던 개찰구가 10을 넘어서서 11, 12, 13으로 이어지고 각 개찰구의 위치조차 완전히 달랐다. 교통수단의 질과 양이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변했다는 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하나로 연결된 긴 기차도 가다가 행로가 바뀌게 나뉘어 있어 모든 칸을 다 그냥 통과할 수 없다는 것도 새로이 알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난감한 일은 궁금하거나 모르는 것을 물어볼 역무원이 없다는 것이다. 기차 출발 시간은 점점 촉박해지는데 내가 타야 할 기차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 칸에나 올라 기차 안에서 어렵게 만난 여승무원의 간단한 설명을 어찌어찌 눈치로 알아들었다.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대합실로 나가 완전히 다른 개찰구로 들어가야 했다. 조금 당황했지만 계속 기차 번호를 확인해 가며 있는 힘껏 달렸다. 아슬아슬 출발 5분 전에 겨우 차에 올랐다. 간단한 짐으로 조금 넉넉하게 나섰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기차는 정각에 출발했다.

 겨우 한숨 돌리고 앉아 있자니 역무원이 승차권을 보여 달라고 한다. 12호 차표로 13호에 의젓이 앉아 있는 나. 다른 기차를 잘못 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며 부산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오후 3시 17분에 도착한 부산. 마중 나온 작은 시누이와 만났다. 나보다 세 살 어리다. 이미 눈물 젖은 나를 대하며 오빠가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함께 울컥하는 시누이. 서로를 껴안고 잠시 뜨거운 눈물을 거두고 격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래전 부산을 떠나온 나와 달리 부산의 변화를 계속 지켜보아 온 시누이의 안내로 부산역 뒤편, 부산 북항을 구경했다. 글로벌 허브 도시를 지향한 북항 재개발 사업으로 새로이 탄생한 국제 여객 터미널과 항만시설, 해양공원인 친수공원과 건설 중인 오페라하우스, 상업과 업무를 위한 복합 기능 시설들이 깨끗한 바다를 끼고 넓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60년대 말, 중ㆍ고등학교 시절, 월남으로 파병되는 군인들이 갑판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는 커다란 수송선 앞에서 교복을 입고 대열을 갖추어 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맹호 부대, 백호 부대, 비둘기 부대의 군가들을 힘차게 불러 주었던 곳이다.

 사지로 떠나는 아들이나 남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자 모처럼 꺼내 입은 후줄근한 한복자락들을 펄럭이며 부두의 이곳저곳을 초조하게 쫓아다니던 초라한 차림의 군인 가족들. 콩나물 시루보다 더 빽빽히 부두 쪽을 향해 갑판 위 좁은 공간을 비집고 겨우 굴만을 내밀고 있던 장병들의 새까만 눈동자. 운 좋게 서로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온몸으로 신호를 보내며 몸조심하라는 작별 인사로 고함을 질러대던 모습. 어느덧 배는 떠나고 텅빈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 허전한 발길로 망연히 돌아서던 사람들.

 우리도 다시 태극기를 내려들고 꽤 먼 거리를 줄지어 걸어서 학교로 되돌아오곤 했다. 부둣 차가운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시멘트 바닥 쨍쨍 뜨거운 햇빛 내리쬐는 여름에도 방한복도 없이 제대로 된 모자도 없는 교복 차림으로.

 1인당 국민 소득이 300달러를 밑돌던 시절이었던가?불과 몇 십 년 전 일이 참으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수평선 저 멀리까지 펼쳐지는 넓고 맑은 바다와 여기저기 우뚝 솟아 있는 높고 깨끗한 건물, 새로 건설된 아름다운 다리, 한가하고 쾌적한 공원들로 이루어진 깨끗한 도시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중앙역을 지나 용두산 공원에도 올라 보고 남포동에서 저녁을 먹고 국제시장을 거쳐 자갈치역에서 전철을 탔다. 오손도손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당리역의 시누이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따끈한 보이차를 마시고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는 포근한 잠자리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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