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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Jun 13. 2024

멤버가 바뀐 여행

 수안보 나들이

 수안보 한전 연수원, 두 번째 들르는 여행 숙박지다. 2019년 늦가을 사흘, 그리고 5년 후인 올해 초여름 사흘, 2024년 6월 4,5,6일.

 5년 전 그때는 남편을 포함한 다섯 명, 이번에는 퇴직을 앞둔 시동생 부부가 함께한 여섯 명, 시댁 형제들 나들이다. 큰시누 부부, 시동생 부부, 작은시누 그리고 나.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라는 명칭으로 50년 세월 얼굴 마주해 온 인연들이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시누이 둘과 열한 살 어린 동서, 네 여자가 이틀밤을 한 방에서 잠자고 아침, 저녁 두 번씩 노천탕이 갖추어진 온천을 알몸으로 들락거렸다. 수안보 온천은 특히나 피부병 치료에 효과가 좋다고 소문나 있다. 태조 이성계가 악성 피부염을 치료하기 위해 자주 찾았고 의료 시설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목욕 손님과 환자들로 사시사철 붐빈 곳이라고 한다. 온천수 느낌이 참 좋다.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는 노천탕과 발가락을 간질이는 닥터 피시탕을 따로 또 같이 편안하게 들락거리며 모처럼의 귀한 온천을 즐겼다.

 한전에 근무하는 큰시누이의 사위 덕분에 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올해는 본인이 직접 와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마산에서 이곳 수안보까지 조카 부부가 부모님을 모셔다 드리고 다시 승용차로 두 시간이 넘는 먼 길을 되돌아갔다.


 시누올케 사이에는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로 다르게 불리는 같은 어머님이 계신다. 이 두 호칭 사이에는 이해나 공감으로 쉬이 좁혀지지 않는 엄연한 거리감이 있다. 긴 세월 사뭇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사고방식이나 행동의 차이도 크다. 열한 살이나 차이나는 손아래 동서와는 시어머님을 중간에 두고 많이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다. 부당한 변명과 구차한 응대를 거부했던 내 무능력 탓이 컸다. 소통에 서툴렀던 나의 옹졸한 고집으로 남은 사건이다.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그로 인해 크게 실망했던 상처가 있다.

 모든 것 다 문제 삼지 않고 시간 속으로 흘려보내면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한다. 예의 바르게 대하고 서로를 존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니까. 다행히 모두 잘 받아 준다.

 특히 세 살 어린 작은시누이에 대한 고마움은 크다. 내가 난처한 입장이 되거나 외톨이가 되어 있다 싶을 때 항상 조용히 내 편에서 따뜻하게 챙겨 주곤 했던 순간들이 여러 번 다. 소통에 서투르고 뻣뻣했던 나였기에 자주 겪었던 그런 순간들을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쓸쓸하고 낭패스러웠던 분위기와 따뜻하고 고마웠던 조용한 배려. 마냥 내 편만은 아닌 걸 잘 알고 있고 시누올케라는 거리가 엄연히 존재했지만 그래도 고마웠던 순간들이 참 많다. 순간순간 끓어오르는 감정보다 차분한 이성으로 갈등의 비등점을 낮추는 두 시누이들의 차분한 인품을 높게 본다. 항상 떠들썩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일곱 명 우리 친정 형제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미덕이다.


 큰시누이의 남편, 시매부 아주버님이 항상 이런 모임을 주최한다. 남편 생전에도 변화를 싫어하는 남편 대신 나에게 먼저 모임을 제의해 온다. 나의 권유와 설득에 어렵게 응하는 남편. 언제 어디서나 반듯하고 예의 바르게 처신하는 오빠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두 시누이들은 함께하는 내내 점잖은 오빠를 살뜰히 챙기고 섬긴다. 그런 동생들 앞에서 남편은 진정 자상하고 부드러운 오빠가 된다. 행복한 남매들이다.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는 여행 속에서 제일 목소리가 크고 으하하 웃음소리도 가장 큰 시매부도 늘 내 입장을 많이 헤아려 주는 편이다. 나보다 여섯 살이 많으시다. 이번 여행에서도 저녁 식사 후 모두 모여 앉은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며 한 말씀하셨다.

 "이 모임의 좌장은 처수씨입니다. 처수씨가 안 오신다면 이 계획은 취소하려 했습니다."

 시동생과 동서, 시누이들을 모두 조용했고 나도 침묵을 지켰다. 아버님 어머님께 든든한 기둥이었고 동생들에게 자랑스러운 별이었던 장남, 나의 남편. 그 빈 자리에 배우자라는 명목으로 이런 명칭이 주어지는 것일까? 나로서는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내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도 큰며느리이니 이런 기회에 의논해야 할 일이 있다. 아버님, 어머님 제사 모시는 일이다.


 2018년, 우리가 고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는 두 분의 기일과 명절 때마다 가까이 사는 시동생 부부가 전이랑 나물을 준비해서 참석하고 우리 자녀들 부부도 모두 참석하는 정식 제사를 모셔왔다. 2년 간의 시골생활과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의 코로나, 남편의 발병 등으로 이제는 형제들 각자 따로따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흐지부지한 제사 방식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누이와 동서는 침묵을 지키고 나와 시동생, 시매부 세 사람의 발언으로 나의 제의가 받아들여졌다.


 봄철 어머님 기일에는 고향에 있는 두 분 산소를 찾아뵙고 가을철 아버님 기일은 사촌들이 다 모이는 추석 벌초에 참석하여 산소를 찾아 뵙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1박을 하든 당일치기를 하든, 참석을 하든 못하든, 그때그때 각자의 상황에 따르기로 했다. 시간과 경비에 구애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큰 숙제가 하나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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