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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29. 2024

각자의 자리에서

 지킴과 나아감

 "2학년 11반, D지점으로 이동해 주세요."

  "자, 앉아 주세요."

 방송에서 듣는 여느 성우의 목소리보다 더 깊고 그윽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달콤하게 울려 퍼진다.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산책로는 아침나절의 청량한 가을 햇볕 아래 아직은 무성한 초록이 만든 짙은 그늘로 서늘하다. 내려다 보이는 종합운동장이 활기로 가득 차 있다. 인근 고등학교의 운동회날인가 보다. 넓은 그늘막 아래에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렸다.

 <ㅇㅇ고등학교 ㅇㅇ스포츠 한마당>

 넓고 잘 정비된 운동장 곳곳에 푸른 젊음들이 자리 잡고 각종 경기들을 펼치고 있다. 아름답다.


 50여 년 전, 학창 시절의 운동회를 떠올려 본다.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좁은 운동장 흙바닥 위. 기합이 잔뜩 들어간 체육 선생님의 긴장되고 고압적인 목소리로 떨어지는 호령들.

 일어서, 앉아, 대기, 집합, 해산 등 한 마디로 표현되는 명령어들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그 시절의 운동회를 떠올려 보니 새삼 오늘 이 장면이 더욱 여유롭고 넉넉해 보인다.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쓰고 난 장갑은 완전히 경기가 끝난 뒤 벗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둡니다."

 "경기 도중에 벗지 않습니다."

 친절하고 자상한 안내다.

 줄다리기 경기가 시작되었다. 줄다리기에 참여하는 모든 학생에게 손바닥 보호용 장갑이 지급되는 모양이다.

 감청색 반팔, 반바지 체육복을 시원하게 갖춰 입은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풋풋한 모습들이 싱그럽다. 50여 년 전의 우리들로서는 꿈도 못 꾸었던 풍요와 고품격의 선진 대한민국이다.


 비슷한 느낌으로 울컥해졌던 이틀 전 일이 떠오른다.

 10월 10일로 예정된 재경 총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서 열일곱 명의 동기 친구들이 올라온다. 그들의 1박 2일 서울 일정을 위해 친구들 몇이 사전답사를 나선 날이었다. 지난봄, 부산에서 우리가 바닷가를 선물 받았던 것에 대한 답례로 우리는 고궁을 선택했다.

 예약해 둔 식당에 들러 식사를 점검해 보고 근처에 있는 경희궁과 골목들을 찾았다. 아직은 따끈한 가을볕 속에서 인적 드문 경희궁은 그윽하고 기품 있었다. 고궁 뒤편, 보드라운 흙이 깔린 그늘 짙은 숲길 위를 맨발 걷기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오래된 한옥들과 개성 있는 카페들, 음식점들이 정겹게 늘어서 있는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전투 비행기들이 열을 지어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하얀 구름 무지개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국군의 날 행사를 위한 연습비행이었다.

 잠깐 조용해지더니 다시 멀리서부터 폭음이 들려왔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 하늘로 향했다. 아까 구름이 있었던 곳으로 초점을 맞추고 기다렸다. 순간 하늘에 그려지는 환상의 곡선. 찰칵 버튼을 누르고도 영상이 잡히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1,2초조차 길게 느껴졌다. 잠깐 나타났다 바로 사라지는 순간의 미학. 다행히 금세 사라지는 흰 곡선이 잡혔다. 그 끝에는 검은 깨알 같은 비행기들이 매달려 있었다.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비행기의 곡예를 보며 그 안에 타고 있을 최정예 엘리트 공군 병사들이 그려졌다. 뭉클했다. 사리사욕 없이 명령에 따라 목숨까지 걸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청춘들. 90도 직각으로 몸을 누이고 순식간에 눈앞을 지나 멀어져 가는 전투기의 뒤꽁무니쫓을 때는 눈시울이 끈해졌다.


 찢어지고 갈라진 정치권과 그것에 부화뇌동하여 한 치의 타협과 조정도 허용하지 않고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사람들, 티비 화면으로 지켜보는 우리 민초들조차 민망해진다.

경제를 들먹이며 정작은 자신들만의 이익에 혈안이 된 국민의 대표자들, 그들에게 발목 잡혀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선진화된 환경에서 풍요롭게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 멋진 청년으로 자라나 갈고닦은 실력으로 자기가 맡은 자리, 자기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청년들.

 그들이 실망하지 않는 사회, 그들이 좌절하지 않는 국가로 계속 성장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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