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두 살 많은 누나가 있다. 나보다 2년 1개월 먼저 엄마 아빠를 찾아왔다고 한다. 욕심 많은 누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잠자는 것도 그렇다. 누나는 항상 엄마 아빠랑 안방에서 셋이 같이 잔다. 네 식구 중 나는 혼자 작은방에서 할머니들이랑 잔다. 우유도 먹이고 기저귀도 갈아 줘야 하느라 어른들이 밤에 나랑 같이 자는 일은 꽤나 힘든 모양이다. 출근을 해야 하는 엄마 아빠 대신 주중에는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이모할머니, 금요일 밤엔 외할머니, 토요일 밤에는 친할머니께서 나와 함께 주무신다. 수시로 온 방을 굴러다니는 나를 바로 데려다 누이신다. 으앙, 울음소리를 내면 급히 우유를 타 먹이고 등을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 주신다. 짬짬이 얕은 잠으로 칭얼대는 나를 바로바로 토닥여 주신다. 칭얼거림이 길어지면 포대기로 감싸 업고 어두운 밤, 좁은 방 안을 서성거리신다. 내 엉덩이를 살짝살짝 추켜 올리며 흔들어 주신다. 기분이 좋다. 스르르 내 눈이 감기면 살며시 몸이 내려지고 베개 위로 머리가 얹히는 것을 느낀다. 입에 야광 쭈쭈를 문 나는 편안히 온몸을 펼치고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내 팔 안에 동그란 밤색 곰돌이가 안긴다. 엄마가 마련해 주신 나의 애착인형이다.
누나 것은 하얗고 긴 토끼 인형이다. 누나는 세 마리나 갖고 있다.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내 눈에도 쉽게 들어온다. 잠시 눈독을 들이고 가까이 다가가기라도 하면 눈치 백 단인 누나는 매의 눈으로 달려오며 비명을 지른다.
"내 꺼야, 내 꺼야~~!"
홱, 순식간에 나꿔 채 간다. 있는 힘껏 나를 밀쳐 버리기도 한다. 뒤로 나동그라진 나는 놀라고 억울하고 서러워서 으앙,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린다. 나도 하얗고 긴 토끼의 부드러운 털을 만져 보고 싶다. 누나는 더 큰 소리로 운다. 온통 난리가 난다. 육아가 전쟁이 되는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어른들은 얼른 곰돌이를 찾아와 내게 안긴다. 토끼는 주인인 누나 품으로 즉시 안전하게 되돌아간다. 어른들이 울고 있는 누나를 어르고 달랜다. 겨우 울음을 그친 누나는 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야무지게 팔짱을 끼고 옆으로 흘겨보며 눈에 힘을 주고 선언한다.
"미워할 거야, 없었으면 좋겠어!"
그래도 나는 누나가 좋다. 제일 예쁘다. 누나 뒤만 졸졸 쫓아다니다 세게 꼬집히기도 한다. 그럴 때도 내가 하는 일은 똑 같다. 으앙, 섧고도 큰 울음소리로 즉시 내 아픔을 알린다.
드물게 할머니들이 여행을 가시거나 하면 아빠나 엄마가 내 방에 오신다. 아빠는 내가 조금만 보채도 얼른 쭈쭈를 내 입에 물려주신다. 쭈쭈를 피스 메이커라고 부른다. 빨리 잠들라고 내 머리와 눈 위에 손수건을 살짝 올려놓기도 한다. 간혹은 눈을 감기도 하지만 말똥말똥 눈을 뜨고 계속 뒤척이노라면 아빠의 난감해하는 표정에 피곤이 역력하다.
에잉, 나는 좀 더 깨어 놀고 싶을 뿐인데ᆢ.
엄마의 다정하고 동글동글 맑은 목소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성이지만 자주 나랑 같이 자지는 못한다. 엄마 껌딱지인 누나가 더 크게 더 오래 더 잘 울기 때문이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 나는 이제 밤에도 그리 자주 깨지 않는다. 많이 컸다고, 통잠을 자기도 한다고, 훨씬 수월해졌다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오늘은 2024년 11월 3일, 일요일이다.
20일 후면 내가 태어난 지 일 년 되는 내 첫 생일, 돌날이다. 내 주민등록번호 첫자리가 231123이라고 할머니는 퍽 신기해하며 그것에조차 깊은 의미를 두려 하신다.
엄마, 아빠, 누나는 어제 아빠 학회가 있다고 1박 2일 화성으로 떠나셨다. 좋은 호텔에 묵는다며 수영복까지 챙겨 가셨다. 누나는 엄마 아빠랑 함께하는 물놀이가 퍽이나 재밌겠다. 외할머니가 밤에 재워 주셨고 아침에는 친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랑 나는 아주 친하다. 할머니랑 같이 있을 때 유난히 소리 내어 잘 웃는 나를 아빠는 신기하게 바라본다. 아빠랑 있을 때는 내가 이렇게 순하고 착하지 않은 떼쟁이라고 억울해하신다. 아빠는 나를 가장 많이 가장 오래 힘센 팔뚝으로 계속 안아 주신다. 나는 시침 뚝 떼고 키 큰 아빠의 듬직한 팔에 안겨 내가 늘 기어 다니던 우리 집 거실 바닥을 이곳저곳 느긋하니 내려다본다. 널려져 있는 온갖 물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린 내 눈에도 대단한 물량이다.
할머니와 단둘이 있는 일요일.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집 앞 놀이터로 나오셨다. 11월, 서늘해진 날씨라 두툼한 윗옷을 챙겨 입히셨다. 엄마가 준비해 두신 납작한 운동화가 내 발에 딱 맞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바깥 날씨가 찬란하다. 할머니는 나를 유모차에서 답삭 안아 올려 땅에 내려 주셨다. 바로 눈앞에 흔들흔들 재밌어 보이는 말이 보인다. 손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어, 어' 소리를 냈다. 할머니가 바로 안아 올려 주셨다. 뭔가 느낌이 좋다. 아래위로 엉덩이를 슬쩍 움직여 본다. 흔들흔들 말이 움직인다. 옆에서 할머니가 잘한다고, 잘한다고 장단을 맞춰 주신다. 조금 더 세게 움직여 본다. 재밌다. 흥분한 나는 점점 더 크게 움직였다. 말이 더 세차게 나를 흔들어 준다. 정말 재밌다.
할머니 팔에 안겨 땅 위로 내려왔다. 폭신한 초록색 바닥 위에 듬뿍 뿌려져 있는 커다란 낙엽들이 작고 노란 은행잎들과 함께 누워 있다. 뒤뚱뒤뚱 걷는 내 발걸음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있다. 친구들과 손에 손을 잡고 있다. 어른들이 맑고 푸르다고 멀리 눈길 보내는 가을 하늘은 키 작은 내 눈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는다.
한 달쯤 전부터 조금조금 걷기 시작한 내 발걸음은 이제 앞으로 앞으로 나를 마구 데려간다. 빠르게 뛰어다니는 형아들이 휙휙 옆을 스쳐 지나간다. 부딪힐까 봐 겁이 난다. 나도 모르게 두 눈이 꼭 감긴다. 형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놀기에만 바쁘다. 크게 소리 내어 이름들을 불러댄다. 깜짝 놀라 그쪽을 쳐다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도 혼자 발길 가는 대로 여기저기 걸어 다녔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서 풀잎도 만져 보고 할머니 손에 이끌려 미끄럼틀도 올라가 보았다.
어른들이 만추, 늦가을이라고 말하는 11월의 첫 일요일. 놀이터 나들이는 정말 재밌다. 너무너무 예뻐하며 잘했다고 거듭 칭찬해 주시는 할머니 품에 안겨 집으로 들어왔다.
손을 씻고 반으로 턱 쪼개 숟가락으로 떠 먹여 주시는 바알간 홍시를 꼴깍꼴깍 입 속으로 받아 삼켰다.
달콤한 맛이 입 안 하나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