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런?
"외할머니, 새해 그림입니다~!"
외손녀 D와 내 카톡방의 첫 문장이다. 어린 나이라 아직은 카톡을 하지 않는 줄 알고 있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뒤이어 바로 밑에 올라와 있는 그림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역동적인 강렬함과 신비감.
바로 답글을 넣었다.
"푸른 뱀 위에
푸른 꿈을 싣고
푸른 희망의 나라로 가는구나.
꿈과 희망이 가득 찬 귀한 연하장이다.
Excellent,
Lovely Raphaella♡"
<2025년 을사년 (乙巳年) 푸른 뱀의 해>
한동안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볼수록 구석구석 눈길을 끌었다. 손녀가 긴 시간 특별한 정성을 들인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홀린 듯 보고 있자니 그림 속에서 많은 이야기가 읽힌다.
지혜로 상징되는 뱀이 날카롭게 빛나는 최첨단 금속, 특수 제작된 강인한 몸으로 거침없이 온 우주를 누빈다. 사소해 보이는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며 영리해 보이는 두 눈을 반짝인다. 비늘 하나하나,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워 초대형 컴퓨터 뇌에 정보를 모으고 분석한다. 날름거리는 긴 혀를 이용하여 인간의 질문에 바로바로 답해 준다. 자신만만하다. 힘이 넘친다. 한 치 망설임도 없다. 어디든 필요한 곳이면 바로 달려갈 팽팽한 긴장감이 넘친다.
그 뱀 위에 꿈쩍도 않고 유유자적 앉아 있는 한 어린이가 있다. 요동치는 뱀 위에서 깊은 명상에라도 잠긴 듯 아름다운 가락의 피리를 분다. 하모니카도 아니고 아코디언도, 바이올린도 아니다. 피리다. 현자와 은둔자들에게 사랑받던 악기. 그림 속의 피리는 초현대화된 미래의 피리다.
표정과 몸짓이 평안하기 이를 데 없다. 최신 인공지능의 최첨단 산물인 뱀의 주인이 되어 의연하게 그를 부리며 신선의 경지에서 악기 연주와 명상에 젖어 있다. 마치 현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물질을 압도하는 정신세계의 유유자적함을 지닌 미래형 인간, 포스트 휴먼. 우리 다음 세대를 이어갈 새 주인공이다.
어린이를 내려다보며 따뜻하게 미소 짓고 있는 또 한 마리 뱀이 있다. 제2의 주인공, 2025의 두 번째 2자로 표현된 하얀색 아기뱀이다. 발 밑의 어린이에게 한없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살짝 치켜 세운 꼬리로 상대를 향한 무한한 충성을 보여준다. 언제든 상대의 마음을 읽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따뜻한 몸짓이다. 최첨단 물질문명의 산물인 AI도 타인을 향한 감정을 갖춰 포스트 휴먼인 어린아이와 상호 반응하는 모습이다.
숫자 2를 슬쩍 변형시켜 뱀의 형상을 만들고 살짝 점 하나를 찍어 따뜻한 뱀의 표정을 그려 낸 D의 창의력과 기술적 표현력이 감동적이다.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하는 어린 D의 어디에 이렇듯 깊은 철학과 예술이 담겨 있었을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것들이 녹아들어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려 내었으리라. 오래된 벗을 대하듯 손녀와 나눌 이야기가 많아졌다. 직장 일로 바쁜 엄마, 아빠, 연년생인 남동생 사이에서 의젓하게 자란 고운 모습이 고맙고 대견하다.
함께 살던 시절, 요리에 자신 없는 주방장이었던 내게 어린 두 녀석 밥 먹이는 일은 큰 숙제였다. 하지만 크게 애먹이지 않고 무난하게 잘 먹고 잘 자라 주었다. 몇 술 뜨지 않는 날에도 첫 숟갈을 뜨고는 항상 엄지 척을 해 주던 D. 아이들 먹이는 일에 늘 긴장해 있던 내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초등학교 2, 3학년쯤 되던 어느 날이었던가? 내가 차려 준 감자볶음을 한 젓갈 집어 먹더니 D가 말했다.
"할머니, 이건 반칙 아니에요?"
짐짓 진지한 표정과 엄숙한 어조였다.
'무슨 말이지?'
바싹 긴장되는 나.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다음 문장.
"감자볶음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요?"
순간 나는 터져 나오는 큰 웃음으로 화답했다.
따뜻한 고마움으로 깊이 간직되어 있는, D와 나의 내 오랜 기억 속의 하루다.
<2024년 갑진년 (甲辰年) 푸른 용의 해>
손녀가 그린 작년 연하장
일 년 내내 내 카톡 대문사진으로 애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