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
당뇨병은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보이지 않는다. 목이 마르거나, 소변이 자주 마렵거나 그 정도뿐일 수 있다. 오랫동안 높은 혈당을 조절하지 않은 경우 심혈관질환(심근경색, 뇌졸중), 백내장, 신장질환, 감염 등의 위험이 높아진다. 당뇨발이라고 해서 발 끝까지 혈류가 도달하기 어려워지고 감각신경도 손상되어 발 끝이 썩어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당장에는 보이지 않고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난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진행되면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당뇨가 무서운 병이다. 미리 알고 관리해야 심한 합병증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당뇨가 진행되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치료에 대한 중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도 있다. 약을 잘 먹어서 혈당을 관리해야 한다고 누차 말해도 자기 일 아닌 듯이 안 듣는 사람도 있다. 의사가 아무리 환자에게 좋은 것을 권하고 싶어도 본인이 거부하면 강제할 수가 없다.
이렇게 다양한 약의 조합으로 당뇨를 조절할 수 있다.
이 할머니(가명)는 고집이 세다. 이미 당뇨약을 3가지 종류의 약으로 조절하고 있는데, 식후 혈당이 300을 넘어가고 있다. 정상 혈당 수치는 식후 2시간에 측정했을 때 200보다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보다 한참 위에 있다. 예전에 효과가 좀 더 좋을 것 같은 다른 약으로 바꾸었다가 위장 불편감, 두통 등의 증상을 호소하셔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3종이긴 해도 각각 고용량 처방은 아니었기 때문에 용량을 좀 더 높여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극구 약에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아 했다. 이전의 부작용도 한몫했겠지만, 기존에 드시던 약을 증량하는 것도 무턱대고 “약 변경하는 거 싫다, 원래 먹던 그대로 달라”라고 거부하셨다. 똑같은 약을 저녁때 한번 더 복용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쭤봐도 싫다고 하셨다. 최근에는 약을 늘려야 된다는 얘기만 하면 자꾸 어물어물하면서 딴 소리를 하곤 했다. 그래서 이 할머니께 당뇨 합병증의 가능성도 열심히 설명해드리고 약으로 조절이 안되면 병원 가셔서 결국 인슐린 주사 맞으셔야 된다고, 그러면 지금처럼 편하게 약 먹는 게 아니라 따끔따끔하게 배에 주사 놓으셔야 된다고도 말씀드려 보았다.
여기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고용량으로 3-4가지 약을 써도 당뇨가 잘 조절되지 않는 경우 보건지소의 한계를 벗어나게 된다. 보건지소는 겨우 혈압이나 혈당 측정만 하고 약 처방 정도 할 수 있을 뿐인데 그 외의 많은 검사나 치료들은 의원이나 병원급 이상에서 가능하다. 인슐린 주사도 마찬가지다. 진료 환경뿐만 아니라 의사 개인의 입장도 있다. 의학교육은 도제식 교육이 중요하다. 경험이 많은 의사가 뛰어난 의사가 된다. 책으로는 배웠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기 어렵다. 의대 졸업하고 수련도 받지 않은 일반의로서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물론 컴퓨터 하나, 침대 하나 달랑 놓여 있는 3평 남짓한 보건지소 진료실에서는 추가로 필요한 검사와 치료가 무엇인지 알아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더 큰 병원으로 가시도록 진료의뢰서나 소견서를 써 드리는 일.
그런데 보건지소를 찾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기적으로 시내의 큰 병원에 가기를 부담스러워한다. 거동이 불편한 경우도 많다. 돌봐줄 자녀가 없으면 혼자서 일도 하고 끼니도 해결해야 하는데 병원 갈 시간까지 내기 어렵다. 또 어떤 분들은 경제적인 상황이 넉넉하지 않아 큰 병원에 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보건지소의 진료비는 500원밖에 안 하기 때문에 큰 메리트가 있다. 보건지소에는 이런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상급 의료기관에서 더 좋은 치료를 받아야 함에도 환자의 환경적인 상황이 맞지 않아 보건지소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경우다. 이런 분들한테는 건강을 위해 더 좋은 치료가 필요함에도 전원을 강하게 권유하기가 어렵다.
이 할머니는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고 계셨는데 4개월 만에 다행히도 약을 증량해보자는 내 설득에 동의하셨다. 다음 내원할 때에는 부디 할머니의 혈당이 많이 낮아져 있기를 바란다.